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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Nov 21. 2021

아이들과 나눠 쓰는 시간

아이를 낳기 전, 하루 8시간씩 그림을 그렸던 그녀는 아이를 낳고 그럴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4분의 1로 줄었다. 짬짬이 그리는 이 시간이 의미가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였지만 그녀는 붓을 놓지 않았다. 하루에 한 장씩. 30분에서 한 시간. 길어야 두 시간. 그렇게 그림을 그렸다. 공들여 그린 그림이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훔친 시간"이라 표현한 그녀의 전시회에 갔다.


하나의 선, 짧은 순간의 붓터치가 모인 그림들이 나를 맞이했다. 그녀의 훔친 시간을 대놓고 보는 호사를 누렸다. 알록달록 화사한 색감이 가득한 그림 속에 내 마음이 경쾌해졌다. 마치 "마법의 숲"이라는 소행성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내가 상상됐다. 마법의 숲에는 호기심 어린 눈의 부엉이, 반갑다고 인사하는 발랄한 토끼,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나무들, 다양한 표정을 한 어린아이들이 가득했다.


그녀의 마음이 호기심으로 가득 찬 것도 있겠지만, 아이를 키우며 동심과 더 깊이 대화한 덕분에 "마법의 숲"같은 그림들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아이들과 나눠 쓴 시간이 꽤나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혼자 쓰던 24시간을 아이를 낳은 후부터 지금까지 아이와 나눠 쓰고 있다. 절반으로 딱 잘라 나눠 썼다면 그나마 덜 억울할 텐데 딱 절반씩 나눠 쓴 것도 아니다. 신생아일 때는 온전히 아이와 함께 24시간을 보냈다. 지나온 시간을 더듬어보면 아기와 함께 웃음 짓는 시간도 많았지만 눈물겨운 시간도 많았던 것 같다. 신생아는 자폐 상태에 가깝기 때문에 소통을 할 수도 없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울고 먹고 싸는 것 밖에 모르는 아이를 돌보는 게 참 쉽지 않았다.


아기가 울면 어찌해야 될지 몰라 같이 울고 싶은 날도 많았다. 손 놓고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도,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빼도 박도 못하는, 돌아갈 수도 없는 시간이 때론 버겁고 힘들었다. 그저 나 하나만 바라보는 연약한 존재 앞에 오히려 더 나약해지기도 했다. 나 하나밖에 모르던 내가 누군가와 시간을 나눠 쓰는 일이 참 어려웠다.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지날 것 같지 않았던 시간이 지나갔다. 함께 나눠 쓰는 시간 속에서 아이가 자랐고, 나도 자랐다. 24시간 온종일 함께했던 그 시간은 조금씩 나만의 시간으로 되돌아오는 중이다. 조금은 여유로워지고 한결 수월해졌다. 이제는 나눠 쓰는 시간이 어색하지 않다.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하지만 여전히.... 이기적인 나는 내 일에 집중할 때, 아이가 "엄마"를 부르거나, 같이 놀자고 조르면 양미간이 찌푸려진다. 이전에 비하면 내게 주어진 시간이 엄청 많아졌는데도 말이다.


그런 나에게 그녀의  "훔친 시간"이 선사한 많은 그림은 10분, 20분, 30분의 짧은 시간도 의미 있다고 이야기해준다. 조급한 마음이 나를 재촉하지만, 느리지만 꾸준히 하나하나 쌓아 올려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시답지 않은 한 줄의 글, 별 볼 일 없는 글감, 별 의미 없는 듯한 생각이 아이들과 함께 영글어감을 믿는다. 이제 아이를 빼고는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없기에... 그러고보니, 내가 쓴 글들 중 작게나마 이목을 받았던 글도 대부분 아이와 함께한 일상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니, 아이들과 나눠 쓰는 시간은 꽤나 의미 있는 시간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10분, 20분, 30분. 내가 마무리해야 하는 일에 다가가고 싶다.

조그마한 시간과 작은 꾸준함을 모아 완성해가고 싶다.

'틈틈이'와 '짬짬이'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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