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하루가 시작되어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던 그림책 <빨간나무>에서처럼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다. 살며시손만 닿아도 힘없이 바스라질 낙엽들이 온 세상에 가득한 날이 있다. 새로운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다가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나를 마주할 때면 침울해지기도 한다. 내가 열심히 한 일이 다른 사람의 영광이 되어버릴 땐 맥이 풀리기도 한다.
내 마음이 무어라 이야기하든 말든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열심히 주어진 일들을 한다. 직장 일, 아이를 돌보는 일,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는 일, 새롭게 도전하는 일. 어느 것 하나 놓지 못하고 아등바등 사는 내 모습이 가끔은 처량해 보일 때도 있다. 과연 나는 놓지 못하는 걸까? 놓지 않는 걸까?
아무리 많은 소논문을 썼다 한들, 박사논문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법. 남들은 소논문 한 편 쓰고 졸업논문 쓰는데 나는 뭣한다고 소논문만 이리도 많이 썼을까? 시절을 아껴 야금야금 해야 할 일들을 빨리 마무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어려운 거 말고 쉽게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흘러넘치는 일을 못하겠다 말 한마디 못하고 꾸역꾸역 해나간 내가 미련스럽다. 깜냥도 안 되는 일을 호기롭게 벌인 내가 원망스럽다.
어릴 적 힘들게 식당일을 하던 엄마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열심히 공부해서 손에 물 묻히는 일, 고생스러운 일 하지 마.'
엄마 말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손에 물 묻히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또 너무 말을 잘 들었던 건지... 지금까지 그래서..... 공부하고 있나 보다.
지금 내가 마음이 아픈 건, 찬밥 신세가 된 우리 아이들. 박사를 시작할 때, 엄마랑 같이 자고 싶어 했던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책에게 엄마를 양보할게. 똑똑 박사 돼서 나 이것저것 많이 알려줘야 해!' 아이들이 그토록 바랐지만, 엄마는 아직 똑똑 박사가 되지 못했다. 일하느라, 박사 논문 때문에 낑낑 대느라 생각이 너무 분주하다.
오늘 저녁은 콩나물 한봉 다리 무친 저녁 밥상. 맛난 반찬 하나 못해주고 콩나물 반찬 하나 올린 저녁 밥상에도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괜히 눈물이 났다. 콩나물 하나 무치면서도 머릿속에는 해야 할 일이 가득했다. 그림책 <빨간 나무>처럼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해야하는 일투성이, 의례적으로 참석해야하는 모임까지.... 모든 것이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고 까만 암흑 속에 갇힌 듯하다.
그런 날이 있다.나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그런 날. 이것도 저것도 다 못해 널브러져 있는 내가 한심해 보이는 그런 날. 뚝딱뚝딱해내는 천재 같은 누군가가 부러운 그런 날. SNS 속에 화려함이 가득한 이름 모를 그녀들이 부러운 그런 날. 능력도 되지 않는 네가 뭘 그렇게 하겠다 난리냐며 나 자신을 스스로 비웃는 그런 날. '네가 뭐가 부족해서?'라고 되묻는 이들에겐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는 그런 날. 아무도 날 이해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날.
차디찬 절망의 바람이 세차게 불어칠 때마다 나의 마음은 굼실굼실 거센 파도처럼 너울거린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방패막 하나 없이 맨 몸으로 서있다. 거센 파도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지기 마련인데 뭘. 우울해도 괜찮아. 절망해도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빨간희망의 나뭇잎이 내 눈에도 다시 보일 때가 있겠지. 그 땐 , 빨간 희망의 나뭇잎을 고이 주워 마음 갈피 안에 소중히 간직해야지.
'있잖아. 실은...... 나는..... 나란 애가 더 잘됐으면 좋겠어. 나는 내가 너무 애틋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