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연락처를 적어서 직원분께 건넸다. 전화를 기다려보기로 하고, 열람실로 들어갔다. 읽고 싶었던 신간이 떡하니 전시되어 있었지만,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 서울에서제주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이 시간. 휘청이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잠시 앉았다.
그러니까. 내가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를 찾아 제주를 찾아온 이유는 이렇다.
2021년 1월. 여행을 사랑하건 그렇지 않든 간에 누구나 집콕해야하는 시절이 되어버렸다. 코로나로 인해 삶의 지경은 축소됐고, 집과 회사인 생활터전만 겨우 오가며 지냈다. 제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지독한 향수병이 있다.때문에 1년에 한두 번은 꼭 제주를 찾았는데. 이번에는 쉽게 갈 수 없었다. 청정구역인 제주를.... 어느덧 육지 사람이 되어버린 내가 간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친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손바닥만 한 그림책 <여우책>을 만나고 나서다. 그림책 표지에는 보드라운 갈색털의 두 마리의 여우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코로나로 얼어붙은 내 마음도, 겨울의 차가운 공기로 움츠러든 내 몸도 이 그림책을 보고 있자니 따듯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듯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은 "잘 지냈어?"라는 여우의 안부가 내 마음을 두드렸다. 오랜만에 만나지만, 세월의 흐름이 무색할 만큼 덤덤하게 "잘 지냈어?"라고 묻고 싶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있잖아. 내가 필요하다면 얼른 갈게.”라고 약속했던 친구를 만나고 싶었다.이어폰을 나눠끼고 함께 음악을 듣던 친구.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던 친구. 제주도에서 전라도까지 배를 타고, 기차를 타고 함께 여행했던 친구. 눈송이가 휘날리는 바람결에 하늘을 향해 웃고 있던 20살의 너와 내가 그리워졌다. 문득 차오르는 그리움에 구글링했다. 다행히 친구의 이름이 특이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자! 이제 ‘TV는 사랑을 싣고’ 프로그램처럼 무작정 친구의 직장을 찾아가 인사를 건넬지 아니면 마음으로만 상상하고 말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나의 방문이 반가울까? 친구도 내가 그리운 순간이 있었을까? 만약, 반갑지 않다면... 너무 무례한 방문이라면 참으로 미안할 것 같다. 나만 그 시간 속에 우리가 참으로 좋은 친구였다고... 서로 의지함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면....무척이나 서운할텐데....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또 다른 친구인 K양을 찾아 헤맸다. 친정에서 가져온 차마 버릴 수 없어 이고 사는 편지 상자를 뒤졌다. 20년이 훌쩍 지난 편지를 찾아 뽀얀 먼지를 닦았다. K양이 마지막으로 전해 준 아이디를 발판 삼아 지메일, 한메일 등 메일 주소를 바꿔 닿지 않는 편지를 보냈다. 메일을 보낸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소식이 없었다.... ‘결국, 연락이 닿지 않는구나.’라며 체념했다. 하지만 얼마 전, 메일을 확인한 친구에게 카톡이 온 것이 아닌가. 친구 말론 쓰지 않는 메일이지만 그냥 들어가 봤다고 한다.
떠나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연락이 닿은 K양과 만나야 한다. 그리고 연락이 안 닿은 J양이 일하는 곳으로 깜짝 방문해야겠다. 당장 달려가 보고 싶은 마음을 꾹 꾹 눌러둔 채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나는 제주로 온 것이다. 그리움과 세월이 흐른 서글픔을 함께 비행기에 싣고 이 곳에 온 것이다.
생애 처음 함께했던 여행. 야자 땡땡이치고 갔던 노래방. 수업시간에 몰래 써내려간 편지 속 위로와 푸념들이.. 때로는 힘이 되었고, 때로는 그리움에 눈물지었노라고 담백하게 얘기해보리라. 마흔이 넘어 어느덧 중년이 되었지만..결혼하고 나를 닮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10대 꿈 많았던 소녀로 돌아가 꿈을 이루었냐고. 삶이 기대하고 꿈꿨던 대로 살아지느냐 물어보리라.
그렇게 찾아온 제주인데... 친구가 이곳에 없다.수많은 상념에 사로잡혔던 시간이 흘러.. 제주에 왔는데 친구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J양에게 연락이 올까? J양을 만날 수 있을까? 혹시 친구에게는 반가운 만남이 아니라면 ... 연락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도서관 분들이 애써주지 않는다면 내 연락처가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던 찰나.
'드르르륵' 내 손만큼 떨리는 진동….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000? 야 목소리 들으난 알큰게. 너 맞구나 이~"
당장 친구가 사는 곳으로 달려갔다. 23년 전, 이곳은 온통 딸기밭, 귤밭이었는데 우리가 헤어져 있던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고 싶은 듯 온통 변해있었다. 내 마음은 20년 전, 깻잎 머리여고생인데 말이다. 좋으면 좋다고 온몸으로 소리치던 그 때처럼 소리라도 지를 태세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다행히도 우리가 만난 장소인 카페는 아주 조용했고, 덕분에 소리를 지를 뻔한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옆에서 아이들이 엄마 진짜 창피하다며 :))
지나간 우리의 나날들이야기처럼 커피도 참 따듯하다. 고등학생 때 그토록 마시고 싶었던커피를 벗 삼아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그때 그랬는데.. 노래방에서 수도 없이 불렀던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노래가 이제 진짜 우리를 이야기하는 노래가 됐다며 웃었다. 그 시간 속에 너와 나를 그려보는 시간이 꿈만 같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버린 아쉬움과 함께 또다시 이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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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벅찬 감동 뒤에는….
다들 잊은 채, 혹은 잊지 못하더라도 물 흐르듯…. 억지 부리지 않고 살아가는데 난 무슨 바람이 불어 "보고 싶다 친구야"를 찍고 싶었는지….
내 삶이 여유로워졌구나 싶으면서도….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리는 건 아닌지….못내 서글퍼졌다.
마흔의 시간은 ... 그렇게 그리움에 범벅된 채, 여고시절 친구를 무턱대고 찾아갈 용기가 생기는 시간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