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춘기

사랑의 형태 02

by 민돌

그때는 14살 여름방학이었고, 도망치던 상황이었기에 다른 지역으로 집을 구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니의 회사에서 며칠간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는 사이 나는 첫 월경을 시작했다. 처음 브래지어를 사던 날 내가 진짜 여자가 되는 날에 파티를 해준다고 했던 부모님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케이크도 꽃다발도 없이 혼자 어른에 한 발 가까워졌다. 물론 엄마의 축하를 받았지만 내가 신경을 쓰이게 한 건 아닐까 왜 상황이 안 좋은 지금 시작된 걸까 미안하다는 생각이 가득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서울 중심에서 살던 나는 의정부로 이사를 가게 된다. 1.5룸 임대 아파트에서 살던 우리에게 3층짜리 주택의 2층에 위치한 2룸의 넓은 집은 너무 좋았지만 낯설었고, 낯선 것을 무서워하는 나에게 한 달간의 방학은 긴 시간이었다. 역에서 우리 집으로 가는 골목에 있던 미용고에 다니는 언니, 오빠들이 장난을 치며 말을 걸던 날에는 무서움에 떨면서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유난히 겁도 많고 덩치도 작은 중1 짜리 꼬마였다.)


엄마는 안전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이유로 전학을 하길 바랐지만 전학을 하게 되면 다신 서울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전학을 가지 않고 지하철로 통학을 하기로 했다. 이 결정으로 3개월 만에 다시 서울의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집에서 가장 높은 건 변기인 희한한 반지하로 이사를 가게 된다. 이 집이 나의 상처가 가장 많은 집이기도 하다. 오래된 주택이었고 창고로 사용할 목적이었던 반지하를 여러 개로 쪼개 집으로 만든 모양새였다.


내가 사는 주거 환경은 나빠졌지만 행복만 할 거라고 했던 생각은 잠시 나에게도 가정 폭력이 시작되었다. 짧은 시간에 많이 변한 모든 상황이 오빠와 나에겐 상처였고 아팠을 텐데 어머니는 경제적인 책임을 지기 위해 일하시느라 바빴던 터라 안타깝게도 우릴 보듬어 줄 어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버티면 되는 줄 알았던 아이들.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란 상처 많은 남매의 사춘기가 겹치며 다툼이 시작되었다. 둘 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아지며 오빠는 나를 때리고 나는 오빠에게 욕을 하고, 나는 문을 잠그고 숨으면 문을 쾅쾅 쳐서 부수기도 했다. 2년마다 이사를 했던 우리 가족의 집은 매번 이사를 할 때마다 집의 문을 교체하고 나와야 했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직접적이고 아픈 상처지만 이미 용서의 과정을 지나는 중이라 자세하게는 서술하고 싶지 않다.


그때는 몰랐지만 돌아보니 부모님의 싸우는 모습을 똑 닮은 상황들이 8년간 지속되며 상처의 골이 깊어져 있었다. 외모도 성격도 정반대인 우리 남매. 오빠는 나에게 느끼는 자격지심으로 모진 말을 하고 나는 오빠를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상황이 반복되며, 서로에게 다른 모양을 띈 상처를 내는 시간들을 보냈다.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은 옳지 않다는 걸 알았고 나는 몸도 마음도 너무 아팠기 때문에 오빠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증오했던 시간들이 있었고, 서로 성인이 된 후에는 괜찮은 척 서로의 상처를 덮어두고 살았던 거 같다. 상처는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다시 터진 갈등의 상황에서 내가 더 이상 싸울 가치를 느끼지 못해 2주간 연락, 대화 모든 것을 다 단절했을 때 오빠가 스스로 생각하며 반성을 하고 난 후 받게 된 눈물 섞인 진심 어린 사과에 드디어 상처 위에 딱지가 앉았다. 딱지가 떨어지고 나면 흉터가 생기고 지워지지는 않더라도 옅어지고 흐려지겠지 생각하며 용서를 하기로 했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내 어린 시절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내 유년 시절에 아버지가 필요했고 화목한 가정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함께하기 싫지만 나를 위해 다시 재결합해 보려는 노력을 했던 게 무색하게 어머니 외에 친할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다른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필요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린 오빠와 나는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각자의 책임감을 느끼며 남보다 빠르게 철이 들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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