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리고 "0원 살기 주간"을 시작했다. 교통비를 제외한 어떠한 소비도 하지 않는 것.
처음엔 며칠 먹다 보면 냉장고가 비겠지 생각했지만 일주일을 꼬박 요리를 해 먹고도 아직도 먹을게 산더미다.
김치냉장고에서 오래돼 잔뜩 쉬어빠진 김치들까지 물에 헹궈 볶아먹으면 한 달은 아무것도 사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고 후폭풍으로 또 한가득 사서 쟁여둘 것을 알기에 김치 파먹기까지는 잠시 미뤄두기로 한다.
하루, 이틀, 삼일. 꽉 차서 테트리스하듯 채워 넣던 냉장고가 하나 둘 비기 시작하는데 왠지 모를 기쁨이 몰려왔다.
집 정리를 하고, 깨끗해진 집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듯이 냉장고도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게 훨씬 더 기분 좋은 일이란 걸 경험하고 있다.
최근엔 '옷방 비우기'도 시작해서 쓸만한 물건들을 엄마한테 보내고, 엄마도 필요 없다고 한 것들은 추려서 버리고 나니 옷방도 텅텅빈 기분이 들었다.
깨끗해진 드레스룸에 들어가는 기분이 낯설지만, 뻥 뚫린 공간을 보면서 역시 기분이 좋아진다.
냉장고속 남은 채소로 만든 채소스프와 티라미수 케이크
갖는 것보다 갖지 않는 것이 즐겁다.
평생 뭔가를 갖기 위해서만 살아왔다.
아파트가 너무 갖고 싶어서 되지도 않는 청약을 닭 쫓는 개처럼 쳐다만 봤고, 명품백이 너무 갖고 싶어서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중고 물건을 뒤지고 뒤진 적도 있었다. 직장인들이 차고 다니는 목줄(사원증)이 그렇게도 갖고 싶었고, 나랑 결혼하겠다는 잘 나가는 애인도 갖고 싶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그중 꽤 많은 것을 갖게 됐지만 그중 어느 것도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토록 갖고 싶던 명품백은 사고 나니 식상해져서 굳이 들고 다니지도 않게 됐고, 선망하던 사원증을 목에 걸고 나니 내 목을 옥죄는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은 많은 것을 포기했다.
되지도 않는 아파트 청약, 당첨이 되더라도 계약금 구하는 데 허덕여야 할 아파트는 진즉에 포기하고 오래고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저렴한 빌라 한 채를 구입했다.
오래전 구입했던 명품백 외엔 새로운 가방을 사기는커녕 이제는 어디서 굴러들어 온 에코백이나 들고 다니지만이 편이 훨씬 더 남들 눈치를 보지 않게 됐다. 명품백도 의외로 유행이 있어서 '신상'을 보면 내 것과 비교되는 느낌이 들었지만에코백은 깨끗하기만 하면 된다.
사원증도, 대기업 타이틀도 내려놓고 적금도 좀 넣고 딱 괜찮게 먹고살 만큼만 버는 지금은 아침마다 도살장 끌려가는 표정으로 버스에 올라타는 직장인들이 그렇게 가여워 보일 수가 없다.
밥 잘 사주는 오빠는커녕, 내가 먹이고 입혀줄 남편을 만났지만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진짜 내가 가져야 하는 건 뭘까?
그 외에는 결국 짐이고 욕심이다. 내려놓고 비울수록 행복해지는 마법은비단 옷장뿐만이 아니다. 인생에서 불필요하게 지고 가는 것들을 조금씩 덜어내다 보면 홀가분한 몸으로 새로운 곳에 에너지를 쓸 수 있게 된다.
가령 터져 나오는 옷장 틈에서 오늘 입을 옷을 발굴하는 대신 식탁에 앉아 여유롭게 차 한잔 하며 글도 읽을 수 있다.
갖고 싶은 명품백을 고르고 인터넷으로 쇼핑을 하는 대신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며 스트레스받았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 틈에서 웃으며 사회생활을 하는 대신 나 혼자 조용히 베이킹을 하거나 글을 쓰며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얼마 전, 지인에게 카톡으로 선물을 하나 보냈지만 거의 이틀간 답변은커녕 글을 읽지도 않아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돼 가던 찰나였다.
"제 카톡이 스팸으로 가득 차 글을 이제야 봅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답변이었다.
나도 한때는 넘쳐나는 단체카톡 틈에 파묻혀 카톡을 거들떠도 보기 싫었을 때가 있었다. 회원들과의 연락은 확인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카톡을 켜봤지만 대체로는 굳이 답변하고 싶지 않은 단체카톡들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내용을 보지 않는 건 안될 것 같아 의무적으로 읽고 읽은 티를 내야 했다. 일이 아니었지만 일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혼자 지내는 일에 익숙해지며 서서히 그 많던 단체카톡들에서 나오거나 자연스레 소멸하고 이제는 정말 꼭 만나는 사람들이 꼭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만 남았다.
냉장고를 비우고 지금 당장 꼭 필요한 것들만 넣어두면 식재료를 빨리 먹어치워야 한다는 압박도, 버려지는 음식도 없으니 죄책감도 사라진다.
먹지도 않을 음식들, 입지도 않을 옷들, 만나지도 않는 사람들, 내 수명을 갉아먹는 과도한 일들을 붙잡고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이지 하며 신세한탄을 해보았다면,
하나씩 비워보자.
내 인생에 꼭 필요한 만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지고 가면 그만이다.
그대 위대한 별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 - 프리드리히 니체 -
결국 중요한건 '나'다.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만으로도 삶은 이미 차고 넘친다.
*메인 사진: 김치나 장아찌, 기본 식재료만 남기고 거의 다 비워진 냉장고 (아직도 가득 차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