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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듕쌤 Aug 17. 2023

냉장고를 파먹는 마음

비우며 행복해지다.

여름엔 음식을 반나절만 상온에 두어도 쉬기 마련이다. 그래서 요리를 하고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바로바로 넣다 보니 냉장고가 터져나가기 직전이 되었다.


그럼에도 집에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해 식재료를 또 주문했고, 더는 냉장고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달 식재료를 거의 100만 원 가까이 구입했다.


단 둘이 사는 집에 뭐 그리 많이 나가나 싶겠지만 우리 집은 배달음식은 일절 먹지 않고 거의 100% 내가 직접 요리를 해서 먹는다. 게다가 집에 손님들이 올 때면 한 끼에 10만 원 이상씩 재료를 주문하게 된다.


이번엔 할인쿠폰을 쓰겠다며 냉동식품까지 꽉꽉 채워 주문하다 보니 카드값이 정신없이 올라갔다.


냉장고 파먹기 시작!


정신을 차리고 "0원 살기 주간"을 시작했다. 교통비를 제외한 어떠한 소비도 하지 않는 것.


처음엔 며칠 먹다 보면 냉장고가 비겠지 생각했지만 일주일을 꼬박 요리를 해 먹고도 아직도 먹을게 산더미다.


김치냉장고에서 오래돼 잔뜩 쉬어빠진 김치들까지 물에 헹궈 볶아먹으면 한 달은 아무것도 사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고 후폭풍으로 또 한가득 사서 쟁여둘 것을 알기에 김치 파먹기까지는 잠시 미뤄두기로 한다.


하루, 이틀, 삼일.  차서 테트리스하듯 채워 넣던 냉장고가 하나 둘 비기 시작하는데 왠지 모를 기쁨이 몰려왔다.


리를 하고, 깨끗해진 집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듯이 냉장고도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게 훨씬 더 기분 좋은 일이란 걸 경험하고 있다.


최근엔 '옷방 비우기'도 시작해서 쓸만한 물건들을 엄마한테 보내고, 엄마도 필요 없다고 한 것들은 추려서 버리고 나니 옷방도 텅텅 빈 기분이 들었다.


깨끗해진 드레스룸에 들어가는 기분이 낯설지만, 뻥 뚫린 공간을 보면서 역시 기분이 좋아진다.

냉장고속 남은 채소로 만든 채소스프와 티라미수 케이크


갖는 것보다 갖지 않는 것이 즐겁다.


평생 뭔가를 갖기 위해서만 살아왔다.


아파트가 너무 갖고 싶어서 되지도 않는 청약을 닭 쫓는 개처럼 쳐다만 봤고, 명품백이 너무 갖고 싶어서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중고 물건을 뒤지고 뒤진 적도 있었다. 직장인들이 차고 다니는 목줄(사원증)이 그렇게도 갖고 싶었고, 나랑 결혼하겠다는 잘 나가는 애인도 갖고 싶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그중 꽤 많은 것을 갖게 됐지만 그중 어느 것도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토록 갖고 싶던 명품백은 사고 나니 식상해져서 굳이 들고 다니지도 않게 됐고, 선망하던 사원증을 목에 걸고 나니 내 목을 옥죄는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은 많은 것을 포기했다.


되지도 않는 아파트 청약, 당첨이 되더라도 계약금 구하는 데 허덕여야 할 아파트는 진즉에 포기하고 오래고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저렴한 빌라 한 채를 구입했다.


오래전 구입했던 명품백 외엔 새로운 가방을 사기는커녕 이제는 어디서 굴러들어 온 에코백이나 들고 다니지만 이 편이 훨씬 더 남들 눈치를 보지 않게 됐다. 명품백도 의외로 유행이 있어서 '신상'을 보면 내 것과 비교되는 느낌이 들었지만 에코백은 깨끗하기만 하면 된다.


사원증도, 대기업 타이틀도 내려놓고 적금도 좀 넣고 괜찮게 먹고살 만큼만 버는 지금은 아침마다 도살장 끌려가는 표정으로 버스에 올라타는 직장인들이 그렇게 가여워 보일 수가 없다.


밥 잘 사주는 오빠는커녕, 내가 먹이고 입혀줄 남편을 만났지만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진짜 내가 가져야 하는 건 뭘까?


그 외에는 결국 짐이고 욕심이다. 내려놓고 비울수록 행복해지는 마법은 비단 옷장뿐만이 아니다. 인생에서 불필요하게 지고 가는 것들을 조금씩 덜어내다 보면 홀가분한 몸으로 새로운 곳에 너지를 쓸 수 있게 된다.


가령 터져 나오는 옷장 틈에서 오늘 입을 옷을 발굴하는 대신 식탁에 앉아 여유롭게 차 한잔 하며 글도 읽을 수 있다.


갖고 싶은 명품백을 고르고 인터넷으로 쇼핑을 하는 대신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며 스트레스받았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 틈에서 웃으며 사회생활을 하는 대신 나 혼자 조용히 베이킹을 하거나 글을 쓰며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얼마 전, 지인에게 카톡으로 선물을 하나 보냈지만 거의 이틀간 답변은커녕 글을 읽지도 않아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돼 가던 찰나였다.


"제 카톡이 스팸으로 가득 차 글을 이제야 봅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답변이었다.


나도 한때는 넘쳐나는 단체카톡 틈에 파묻혀 카톡을 거들떠도 보기 싫었을 때가 있었다. 회원들과의 연락은 확인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카톡을 켜봤지만 대체로는 굳이 답변하고 싶지 않은 단체카톡들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내용을 보지 않는 건 안될 것 같아 의무적으로 읽고 읽은 티를 내야 했다. 일이 아니었지만 일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혼자 지내는 일에 익숙해지며 서서히 그 많던 단체카톡들에서 나오거나 자연스레 소멸하고 이제는 정말 꼭 만나는 사람들이 꼭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만 남았다.




냉장고를 비우고 지금 당장 꼭 필요한 것들만 넣어두면 식재료를 빨리 먹어치워야 한다는 압박도, 버려지는 음식도 없으니 죄책감도 사라진다.


먹지도 않을 음식들, 입지도 않을 옷들, 만나지도 않는 사람들, 내 수명을 갉아먹는 과도한 일들을 붙잡고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이지 하며 신세한탄을 해보았다면,


하나씩 비워보자.


내 인생에 꼭 필요한 만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지고 가면 그만이다.


그대 위대한 별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
- 프리드리히 니체 -


결국 중요한건 '나'다.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만으로도 삶은 이미 차고 넘친다.



*메인 사진: 김치나 장아찌, 기본 식재료만 남기고 거의 다 비워진 냉장고 (아직도 가득 차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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