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린시절,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던 어느 날, 할머니의 집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잔뜩 들어왔다. 어린 난 식탁 아래로 숨어들어갔고 오빠와 장난을 치며 그들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엄마는 그 날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지금은 아이를 낳는 나이가 늦어지며 흔히 들을 수 없는 명칭이지만 나의 증조외할머니는 98세까지 사셨기에 내게는 나,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까지 이렇게 4세대가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건 상상처럼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 집에 머물던 증조할머니는 치매에 걸린지 오래였고, 지금은 표현으로만 존재하는 '벽에 똥 칠 할때까지 사는'분이었다.
할머니는 아이들 다 키워 내보낸 후 증조할머니를 수발하며 십수년을 사셨고 벽에칠해진 남의 똥을 치우며 자신의 인생도 없이 살다그렇게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엄마의 어린시절은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이를 낳고 군대에 간 할아버지 대신 생계를 꾸려나가느라 갓난쟁이를 집에 두고 일을 나갔는데,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갓난쟁이가 숨을 쉬지 않았다.
열달을 배아파서, 고생해서 낳은 제 새끼가 죽었지만 할머니는 다음 날 일을 하러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살아있는 첫째, 우리 엄마를 먹여살리기 위해서였다.
젊어서는 제 새끼들을 먹여살리려 죽어라 일하고, 늙어서는 시어머니의 똥을 닦으며 병수발을 하다가, 이제 자식들도 다 크고 먹고살 때쯤 되자 할머니는 아프기 시작했다.
"나 아무런 맛이 안나."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이 무렵부터 잘 웃지 않으셨던 것 같다. 오래 전, 어린시절 기억으로는 할머니와 함께 화투도 치고 깔깔대며 웃으며 놀기도 했지만 늘 화만 내시는 할아버지의 호통 한번이면 할머니는 깨갱하고 꼬리를 내리고 마셨다.
그리고 그 웃음이 완전히 사라질 즈음, 할머니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셨다.
파킨슨병은 바로 죽는 병이 아니다. 운동을 잘 하고 관리만 잘 하면 진단 후에도 꽤나 오래 살 수 있다. 그리고 나이든 사람에게 자주 진단이 내려지는 만큼 노인들에게는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1주일 후, 치밀한 계획 하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파트 CCTV에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지하에서부터 사다리를 갖고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할머니의 모습이 포착됐다.
그렇게 아무런 표정도 없이 꼭대기 층도 아닌 10몇층 언저리까지 올라간 할머니는 아파트 복도 창문 밖으로 훨훨 날아가화단에서 꽃이 되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표정을 본 가족들은 할머니의 표정이 그간 본 적 없이 아주 편해보였다고 했다. 자신을 위해 뭔가 단 한번도 한적이 없던 할머니는 오로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오롯이 자신 원하시는대로 하셨더랬다.
하지만 가족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나 때문이야."라고 했다.
자신이 어머니의 마음을 잘 헤아려드리지 못해 떠나신 거라고. 살면서 더 잘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내가 생각하는 할머니의 병명은 파킨슨병이 아니라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당시에는 이런 내용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고인을 욕보이는 거라고 그저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알렸다. 오로지 가족들과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내 나이 스물아홉, 내 동기의 부고에 적힌 '심장마비'를 보며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네 의지로 세상을 떠났구나."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나 혼자 엉엉 울었다. 함께 택시를 타고 자리를 했던 동기들은 "이게 대체 무슨일이야"하며 그저 황망해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너무 미안해서,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서, 혼자 외롭게 떠나게 해서 엉엉 울었다.(아니, 어쩌면 그 일이 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랬을 수도 있다.)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처럼 끊임없이 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계속 눈물이 흘렀고, 집에 도착해 엄마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에는 어디에 아껴뒀던 눈물인지 또 한번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그리고 난 일주일간 회사에 갈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만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가 지나자 울음은 멈추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자살자의 가족.
온 가족이 힘을 합쳐 그 사실을 꽁꽁 숨겼지만 이 사실은 바꿀 수 없었다. 그 사건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상처로 남아있음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다.
뭐가됐건 죽는 것 보다 낫다는 걸.
너무 오래 전, 아주 어린 시절 겪었던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가까운 이의 죽음이 내게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너도 그러다 자살할 수도 있어."
대학생활은 힘들었지만 내게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 같았다. 불행한 환경이었지만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건, 해외로 도망을 가던, 결혼으로 팔려가건, 다음 선택지가 존재했다.
하지만 취업 후엔 그런 선택지가 없었다.
계속 다니거나, 퇴사하거나. 실제로는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했지만 회사라는 공간의 숨막힘을 한 번 경험하니 다른 회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같은 업종으로 이직하는 건 선택지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다니던 회사가 상황이 좋은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직을 해도 연봉만 조금 올릴 뿐 상황은 더 나빠질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에 목을 맸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육아휴직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빨리 결혼하고 싶었고 아이를 낳고 싶었다. 하지만 그 또한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회사에 가는 길에 '저 차에 치여 사고가 나면 좋겠다.'며 달려오는 차를 보지도 않고 길을 건넜고,
'다치면 일을 쉬어도 되는건가?'싶어 오토바이도 타고 온갖 위험한 일을 거리낌없이 했다.
당시엔 내가 우울증에 걸려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그렇게 다치는 날만 고대하며 출근을 했었다.
아마 요즘 뉴스에 나오는 초등 교사들도 이런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우울함에 빠지면 퇴로가 보이지 않으니까.
혼자 집에 누워 일주일을 보내고 생각만 하며 우물쭈물 하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자살시도를 했냐고?
아니.
퇴사를 선언했다.
나를 구원해줄 꿈의 배우자를 찾아 헤매다 좌절하면서 그냥 그렇게 우울증에 걸려 생을 마감하게 되었더라면 지금의 행복은 누릴 수 없었으리라.
나의 이번 생은 힘들고 우울함만 기억되는 삶이었으리라.
엄마가 요즘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날이 올줄 누가 알았겠어.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
어머니는 나의 대학시절, 아주 오랫동안 우울증약을 드셨다. 약을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일상생활이 되지 않을 만큼상태는 심각했었다.
하지만지금은 생전 단 한번도 느낀 적 없는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다.
나 또한 어머니의 행복을 바라보며 나의 우울했던 삶에서 탈출했다.
아마 우리 가족 중 누군가는 아직도 우울함에 빠져서 지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삶의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있음에 행복함을 느끼지 못하고 할머니를 보러 가겠다는 가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