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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에 5000만원을 벌고 생긴 일

7화.

by 민듕쌤

취업준비 2학기 만에 테헤란로 한복판에 위치한 한 대기업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계약연봉 4000만 원이라는 금액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은데 통장에 250이라는 큰돈이 매월 따박따박 꽂혔고 명절이 되면 상여금 180씩, 상반기-하반기 상여와 연말보너스까지 통장에 끊임없이 돈이 들어왔다. 상여와 야근수당 등을 모두 포함, 첫 해에 거의 5000에 가까운 돈을 받았다. (그 이후에 번 금액은 다음 편에서)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돈 걱정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늘 과외와 알바를 하며 근근이 버텨오던 삶이 끝이구나 싶었다.


"평생 이런 날이 이어지면 좋겠다."


책임은 주어지지 않는 말단 신입사원, 그러나 연봉은 같은 직급에서 최고로 많이 받는 대졸공채. 이런 회사라면 평생 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들어있던 재무팀은 내 또래 직원들이 엄청 많고 윗사람들도 나이가 꽤나 어린 '젊은 조직'이었다.


재무팀 아래에는 파트가 4개 있었는데 회계 분류를 따른 것이었다.


재무회계를 담당하는 파트, 관리회계 중에서도 직접비를 담당하는 파트, 사무비용이나 금융비용 등 간접비를 담당하는 파트가 있고 마지막으로 회계와는 관련이 없으나 자금조달과 IR(공시)등을 담당하는 파트까지 경영관리팀에 포함되었다. 나는 그중에서 '경리파트'에 속해있었는데 간접비를 처리하고 세금신고나 대금지불 등을 한다고 했다.


팀장님은 당시 40을 넘긴 나이였고, 그 바로 아래 직원이 32세, 그 아래는 30세 1명, 29세 2명, 그리고 26세의 내가 그 밑으로 들어갔다.


우리 파트는 파트장이 따로 없는 '부재'상태였기 때문에 우리의 직속상관은 팀장님이 되었다.



나는 왠지 모르겠지만 어른 남자들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팀장님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또래의 팀원들이나 나이 많은 여자 상사에게 말하고 보고하는 일은 너무도 수월한데 이상하게 우리 팀 팀장님 앞에만 서면 심장이 쿵쾅쿵쾅 뛰면서 생각했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직은 신입사원이었기에 팀장님을 독대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분한테 보고할 일이 생기기만 해도 눈앞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분은 더 큰 회사에서 특별대우로 모셔와 회사 창립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초고속 승진 기록을 새운 분이었다.

남들은 직급이 1 계단 올라갈 동안 그분만 유일하게 4 계단을 뛰어올라 지금은 전무님이 되어계신다. 그만큼 일에 있어서는 빈틈이 없는 '천상 직장인'이었다.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의 말투엔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고 성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발성도 좋고 외모도 수려했다.


나는 유독 그분 앞에만 서면 마치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분한테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너 같은 게 뭘 알아'하는 눈빛이 느껴졌다. 나의 하찮음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기분. 내 브런치북[가난한 자유를 얻어보기로 했습니다]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잘 나가는 남자들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었는데, 그분은 모든 면에서 잘난 '엄친아'였다.


시간이 지나도 '팀장님 공포증'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고 고작 그따위 것에 나는 '회사생활 참 쉽지 않네'라고 생각했지만 햇병아리 같은 생각이었음을 곧 깨닫게 된다.




1년 뒤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점심시간에 회사 식당에서 말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 식당 내부에 틀어진 커다란 티브이에서 무언가 뉴스가 나왔다.


"450명이 탑승한 배 침몰, 약 200명 탈출 못해."

"여객선 침몰사고 구조중"


뉴스에 뜬 영상은 이미 반쯤 가라앉아버린 배와, 아무도 구출되고 있지 않은 장면이었다.


"아니! 구출 중이라면서 왜 구조대는 주변에 가만히 머물러 있기만 하고 사람은 하나도 안 보이는데?? 배 안에서 사람들이 나와야 되는 거 아니야???"


이상했다. 배는 가라앉는 중인데 배 안에서 밖으로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그 뒤로도 하루종일 뉴스를 찾아보았지만 그 이상 구조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뭔가 충격적인 사건이 생기면 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새벽에 화들짝 놀라며 깨기 시작한 게.



세월호 참사가 있고 얼마 안 있어 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거래금액이 매월 수천억에 이르는 큰 회사였던 우리는 매입대금을 지급하는 작업이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고작 입사 2년 차, 만 1년이 조금 지난 내게 그 수천억의 매입대금을 지급하는 업무가 주어졌다.


배우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인수인계를 한두 달 하고 바로 혼자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첫 달, 사건이 터졌다.


"민정님! 돈이 잘못 들어왔다고 전화가 오는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업체와 연락을 담당하는 영업 담당자가 내게 찾아왔다.


"30일 어음을 받아야 되는데 120일 어음이 들어왔대."

"네??? 그건 시스템이 알아서 하는 거라 그럴 리가 없는데..."


수기로 조정하는 일부 데이터를 제외하고는 몽땅 시스템이 알아서 지급기일을 결정하는 반 자동화 시스템 내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지만 이런 전화들이 한건도 아니고 두건, 세건... 계속해서 오고 있었다.


전임자였던 대리님께 보고를 드리고 내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만약 잘못 지급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대략 2000개의 업체에 어음 일자가 잘못 들어갔다면 이건 일일이 취소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발행한 어음을 취소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1. 상대방의 인감을 날인한 취소요청 동의서를 받는다.

2. 우리 회사의 법인인감을 날인한 '어음 발행 취소 신청서'를 은행에 보낸다.

3. 은행에서도 결재를 올려 취소 승인을 받는다.

4. 제대로 된 어음으로 다시 발행한다.


이렇게 상당히 번거롭고 오래 걸리는 일인데 그걸 2000개를 한다고?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음 며칠 길게 준 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겠냐 싶은 분들을 위해 설명을 해보자면,

당신이 1억의 대금을 받았다고 쳐보자. 대금을 현금으로 받는다면 지금 당장 내 수중에 1억이 통장에 꽂힌다. 30일 어음으로 받는다면 지금으로부터 30일 뒤에 1억이 들어오고, 120일 어음이라면 120일 뒤에 내 통장에 1억이 꽂힌다.

지금 당장 결제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그 돈이 4개월 뒤에 들어온다면 지금 당장 나는 파산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어음 할인' 정확히는 '받을 어음 담보대출'이라는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이다.

1년 6% 정도의 이율을 적용한다고 가정하자.

30일과 120일 차이인 90일, 대략 3개월의 이자만 150만 원이다. 만약 지금 즉시 어음 할인을 받는다면 이자 200만 원을 차감하고 받게 되고 1개월 뒤엔 150만 원, 2개월 뒤엔 100만 원을 차감하고 대금을 받는 형식이 된다.

그럼 그 대금이 1억이 아니라 1000억이라면??

90일 치의 이자는 대략 150000만 원, 즉 15억이 된다.


얼마가 어떻게 잘못됐는지는 예상도 할 수 없는 상태. 그날부터 난 새벽 4-5시에 "대금이 잘못 나갔다!"는 꿈을 꾸며 화들짝 깨기를 반복했다.



회사는 아무 이유 없이 사원에게 그 많은 돈을 지급하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월급 두둑이 나온다며 웃고 떠들다 총알 한방 맞고서야 비로소 "아~ 전쟁터가 괜히 전쟁터가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 햇병아리 신병이었던 것이다.



(회사 내부의 비밀유지를 위해 일부 내용은 각색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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