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가장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 리코더를 만났다. 지금도 그때 리코더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나는 인생의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다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고 어떻게 다시 웃을 수 있을까 걱정했던 시간을 지나 이런 삶도 괜찮구나 하는 평온한 나날을 경험하고 있다. 우울에 빠져 있던 나는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안전한 대상'을 찾았고, 그 일에 정신없이 '몰두'함으로써 나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음악 속에서 자유함과 행복, 위로를 만났다. 음악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과 내 귀로 들리는 포근한 음색이 안정감을 가져다주었고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배울 수 있는 넓고 깊은 배움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무엇보다 오늘도, 내일도 할 수 있는 '멋진 일'을 만났다는 사실이 기뻤다.
알토 리코더는 음역대가 낮아 편안한 소리가 나는데 마치 사람의 목소리 같다. 흔히 소프라노 리코더는 바이올린에 비교하고 알토리코더는 첼로 정도의 음역대라고 말하는데 적절한 비유 같다. 소프라노 리코더의 높고 예민한 소리만이 리코더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는데 알토 리코더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완전 그 음색에 반해버렸다. 마음씨 좋은 아빠의 부드러운 목소리 같다고나 할까? 알토 리코더를 불면 저절로 음악 치료가 되는 것 같다.
리코더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수업이 끝난 방과 후 교실에서 리코더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연습을 하다 보니 안 되던 곡들이 조금씩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성장이 느껴지자 아침에 눈을 뜨면 빨리 학교에 가서 아무도 없는 빈 교실의 공명을 느끼며 리코더를 불고 싶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기 전에도 연습하고 있는 리코더 곡을 듣다 자고, 출퇴근 버스 안에서도 레슨 받고 있는 곡의 연주를 반복해서 들으며 어려운 부분을 익혔다. 내가 이렇게 어떤 한 분야에 빠져든 것은 드라마 몰아보기 이후 처음이었다. 사실 그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악기를 배우는 것이 이렇게 성취감을 주는 일인지 처음 알았다.
리코더를 불면 5분도 채 되지 않아 엔도르핀이 나오는 게 느껴진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많은 연주자들의 인터뷰에서 보고 직접 확인한 사실이다. 정말 즉각적인 효과다. 리코더는 다른 관악기와 달리 온몸의 이완이 정말 중요하다. 입술을 포함해 손가락, 얼굴, 목, 어깨, 상체, 모두 완전히 힘을 빼고 코어 근육에만 의식을 집중한다. 한참 연주를 하고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몰두할 때가 있는데 이러한 집중의 과정이 정말 행복하다.
알토리코더로 부는 많은 곡들은 바로크 시대의 소나타가 많은데, 이 바로크 곡들의 특징은 단순하고, 반복되고, 예상 가능한 운율과 리듬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1악장과 2악장, 3악장의 빠르고 경쾌하다가 다소 느려지다가 다시 빨라지는 이 흐름은 나의 삶도 언제는 기쁘다가, 힘들고 어렵다가, 다시 즐거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나의 리코더 선생님은 중학교 때 리코더를 전공하려고 마음먹으셨던 시절, 화장실에 가서도 리코더를 부셨다며 '리코더 덕질에 세계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맞다. 나는 리코더 덕후가 되었다! 드디어 진짜 좋아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매일매일, 별다를 게 없는 나의 삶 속에서 내 성취의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리코더 연습~! 리코더를 부는 일은 교육학에서 말하는 감당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어려움 즉 i+1 정도라서 많은 괴로움이 수반되지 않는 만만한 도전 과제이다. 즉 내가 연습을 하면, 100프로 해 낼 수 있는 정도의 어려움인 것이다. 내가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스스로 느끼는 일은 정말 신나는 일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 것을 믿기에 나는 오늘도 무거운 엉덩이를 가지고 리코더를 연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