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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심리칼럼

불안, 진화가 남긴 생존의 흔적

진화심리학이 말하는 인간의 불안과 그 치유적 이해

by 심리한스푼

1. 우리는 왜 불안을 느끼도록 진화했을까?

인간은 누구나 불안을 느낀다. 상담사로 일하면서 만났던 내담자들 역시 대다수가 불안 때문에 힘들어한다. 누군가는 시험을 앞두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군가는 대인관계에서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운다. 심지어 나 자신도 불안민감도가 높아 일상에서 사소한 사건에도 긴장하며 살아왔다. 한때는 이 불안이 내 의지 부족이나 성격적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리학을 배우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불안은 단순히 나의 약점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체화된 심리적 기능이라는 사실을.



2. 불안의 진화적 기원: 왜 우리는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었는가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인류는 불안을 많이 느낀 조상들의 후손이다. 훗타슈고는 『나는 왜 생각이 많을까』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대 인류의 핵심 행동 원리는 “생존”이었다. 그 과정에서 행복, 두려움, 불안 등 감정은 단순한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진화한 생물학적 장치였다.



이를테면 야생에서 밥을 먹고 있던 조상을 상상해 보자. 뒤쪽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두 부류의 조상이 존재했을 것이다. 첫째, 즉각적으로 긴장하며 불안을 느끼는 조상. 둘째, 낙천적으로 무심하게 식사에 몰두하는 조상. 실제로 맹수가 나타날 확률은 1/100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맹수가 출현한다면, 무심했던 조상은 그 자리에서 생명을 잃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예민하게 불안 반응을 일으킨 조상은 도망칠 확률이 높았다. 결국 살아남은 것은 불안을 잘 느끼는 쪽이었고, 그들의 유전자가 후대에 더 많이 남겨졌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과도하게 불안을 느끼는 이유다.


불안은 결코 “쓸데없는 감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수적으로 발달한 인간의 심리적 장치인 것이다.



유발 하라리도 『사피엔스』에서 이와 유사한 설명을 한다. 그는 인류의 진화를 “상상과 두려움의 진화”라고 부른다. 호모 사피엔스는 여타 동물들보다 훨씬 더 미래를 상상하고 위험을 예견하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바로 그 능력이 오늘날 우리의 번영을 이끌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능력이 과도한 불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즉, 상상력은 생존을 위한 무기이자, 불안을 생산하는 근원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수십만 년에 걸쳐 자연선택 속에서 길러온 생존 본능의 부산물이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글쓴이 최애 책 중 하나인 [사피엔스]


3. 불안에 대한 위로: 보편성과 수용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큰 위로를 얻었다. 그 위로는 두 가지였다. 첫째, “나만 불안을 많이 느끼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이었다. 이는 얄롬이 집단상담에서 강조한 개념인 보편성(universality)과도 맞닿아 있다. 나의 고통과 불안이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인식은 그것 자체로 치유적이다. 내담자들에게도 이 설명을 해주면 종종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본다.


어빈 얄롬(Irvin David Yalom)

둘째, 불안을 많이 느끼는 것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거 나는 내가 멍청하거나 의지력이 부족해서 불안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을 알게 된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불안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DNA에 각인된 일종의 ‘패시브 스킬’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맥박이 뛰고, 호흡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불안을 억누르려는 시도 대신, 그것을 나의 일부로 수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태도일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수용전념치료(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ACT)에서 말하는 “수용(acceptance)”이라고 한다. 불안을 제거하려 애쓰기보다,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 역시 완전히 불안을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불안을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훨씬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4. 문제 해결보다 중요한 원인 이해

사람들은 흔히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물론 이는 자연스럽고 유익한 태도다. 하지만 원인을 이해하는 과정 역시 매우 중요하다. 특히 불안의 경우, 그것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짐이 덜어진다. 이는 “내가 약해서”라는 자기 비난을 “인류가 원래 그렇다”라는 보편적 이해로 전환시킨다. 그 순간 불안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이 살아남기 위해 마련해 둔 본능으로 자리매김한다. 불안은 당신이 의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을 위해 수십만 년 동안 진화해 온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므로 불안 속에서 자신을 탓하는 대신, 불안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더 온전한 삶의 길일 것이다.


5. 나아가며 : It's not your fault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에서 심리상담가 션(로빈 윌리엄스 분)은 주인공 윌에게 반복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 어린 시절의 학대와 상처를 자기 탓으로 돌리던 윌이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치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불안에 대입해 생각해 본다. 혹시 당신이 불안 때문에 중요한 일을 망쳤는가? 혹은 불안이 너무 심해서 일상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이 말을 그대로 건네고 싶다.


"It's not your 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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