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시원하다. 여름이라 일어나면 더워야 하는데 덥지가 않다. 이런 날은 에어컨이 아니라 선풍기조차 켜지 않아도 된다.
창문으로 솔솔 넘어오는 바람이 방안의 공기까지 시원하게 한다. 왠지 기분이 더 상쾌해진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카페에 도착해 휴대폰의 음악을 켜고 테이블을 정리한다.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거 같은 하루. 더워도 실내는 시원하니 이번 여름은 외출만 안하면 지갑의 경제력은 유지되면서 나의 에너지는 소모되지 않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오전에 만나기로 한 친구는 십여 분 늦겠다며 문자를 보내왔다. 오늘 아침은 특별하다. 내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순창의 발효커피 원두를 갈아서 메밀가루와 함께 만든 커피콩 빵을 시식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요리 문외한인 나는 이런 새로운 맛과 누군가의 살아있는 시도를 즐거워한다.
특히 요즘같이 사람 만나기 힘든 그저 조용하기만 한 일상에서 커피로 만든 갓 구운 케이크로 아침을 먹는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근사한 하루의 시작이다. 사람마다 재능은 다르지만 내가 한 요리보다 누군가의 요리를 먹는 건 작은 일상의 큰 즐거움이다.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는 건 이런 여름에 얼마나 뜨겁게 환영할 일인가!
아침이 되자 밤까지 쏟아지던 폭우가 제법 가늘어졌다. 내가 일하는 카페의 건물 2층에 미용실이 최근에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듣지 못하던 물소리를 자주 듣는다. 처음에는 화창한 날에도 물소리가 졸졸 나서 건물 하수구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빗소리인지 하수구 물소리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건물에서 들리는 폭포 소리려니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천정의 물소리도 자연의 소리가 될 수 있다니.
와~ 소리 좋다. 이렇게 카페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니까 커피보다 술 생각이 나는걸.
유난히 비가 많았던 이번 여름. 카페에 놀러온 친구는 천정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진짜 창밖의 빗소리인 줄 생각했다. 그의 기분 좋은 상태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로 듣던 눈으로 보던 그 소리는 모두 물소리다.
여행 중에 만나는 푸른 강물. 바다 같은 수평선이 보이는 넓은 호수. 가까이가면 물보라에 젖을 거 같은 거대한 폭포까지. 모든 자연의 물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마음이 다를 뿐.
소리란 귀를 통해 사람의 마음에 감정을 전달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덕분에 우리는 빗소리가 폭포수처럼 들리는 촉촉한 카페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다가 기분이 업 되어 골목으로 뛰쳐나갔다. 한 블록 거리에 있는 포차에 앉아 시원하게 막걸리 한잔을 마시며 계획 없는 저녁을 보내기도 했다.
나에게 물과 술이 주는 기억은 짧아도 즐겁다.
술이란 맛보다 함께 잔을 부딪친 사람에 대한 기억을 담고 싶어서 좋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는 술잔도 있고 이별을 부른 슬픈 술잔도 있지만, 생각만 해도 미소가 나오는 술잔도 많다. 기쁨도 슬픔도 우리가 술을 통해 나누는 건 사람이 살아가는 하나의 즐거움이자 소통의 수단이다.
빗소리에 혼자 여러 추억의 필름을 감고 있는데 고소한 냄새와 함께 친구가 들어왔다. 잘 포장된 케이크 상자를 내민다. 그녀와 함께 온 친구는 굵은 빗줄기에도 큼지막한 꽃다발을 내민다.
꽃 이름은 ‘미스티 프리저브드’,
꽃말은 청초한 사랑이라고 한다.
묘하게 풍겨오는 보랏빛의 유혹. 언제부터인지 나는 보라색에 끌리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좋아하는 많은 것들이 변하는데 가장 크게 바뀐 부분이 나는 색상이다.
초등학교 때는 빨강 노랑을 좋아해서 10대의 옷장에는 대부분 원색 옷이 많았다. 20대 대학시절은 하늘색과 연두색을 좋아하다가 졸업 후 직장생활 할 때는 오렌지와 갈색을 좋아했다. 30대가 되면서 경직된 사회생활의 영향인지 검정색과 회색 옷들이 많아졌다. 40대가 되면서 부드러운 파스텔 계통을 입기 시작했고, 50대가 되면서 이상하게 보라색과 분홍색에 끌리고 있었다.
오늘은 아침에 창문으로 불어오는 푸른 바람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조용한 골목의 카페 창문에 뿌려진 무채색의 빗소리를 보면서 음악을 들었다.
일상도 색상이 될 수 있는 선물 같은 인생을 우리는 살고 있다. 오늘도 나는 고소한 갈색 케이크와 화사한 보라색 꽃다발로 아침을 시작했다.
회색빛 빗소리도 마음먹기에 따라 하얀색이 될 수 있고, 쾌쾌한 술 냄새도 하늘색처럼 희망이 될 수 있는 일상.
언제나 흘러가는 물소리처럼 청량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고 싶다. 모든 물소리는 나를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술은 나를 소녀감성으로 변화시킨다. 예민하게 사는 건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술 한 잔의 여유로 인간관계를 풀어내는 건 현명하다. 요즘 코로나로 기운 빠지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의 등장으로 향기로운 아침이 시작될 수도 있으니까.
이 꽃은 물을 안줘도 1000일간 시들지 않는대.
와~ 3년이라는 시간을 물 없이 버텨내는 식물의 생명력도 놀랍지만 그 꽃다발의 감동은 포장까지 모두가 보라색이라는 사실이다.
보라색이 주는 유혹 덕분에 카페에서의 시간은 조용하지만 화려하게 채워질 거 같다. 예전에는 보라색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색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보기에는 털털하고 씩씩해 보이지만 무척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이다. 남자처럼 용감하지만 소녀처럼 무서움도 많다. 알 듯 말 듯 한 나의 성격처럼 이 오묘한 보라색이 그런 나를 끌리게 한다. 그래서일까. 장식장의 가장 높은 위치에 꽃다발을 올려놓는다. 살짝 시선만 올려도 느껴지는 보라의 강렬한 향기에 취해 카페에서의 시간이 오래오래 행복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