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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스 Dec 22. 2022

심금을 울린 아기 공룡 둘리

산후 우울감에 대하여


**주의**
  모든 우울감이 우울증이라는 질환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울의 양상은 매우 다양해서 저마다 느끼는 증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필자의 주관적인 경험만을 담고 있으며, 육아로 인한 번아웃이 아닌 출산 직후에 나타났던 일시적인 증상만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를 낳고 급격한 호르몬의 변화를 겪으면서 내게도 산후 우울감이 찾아왔었다. 살면서 우울감을 느껴본 적이야 여러 번 있었지만, 산후에 겪은 증상은 이전의 것들과 질적으로 달랐다. 이유도 없이 종일 마음이 슬펐고 걸핏하면 눈물이 났다. 하루는 아이에게 불러줄 동요를 검색하다가 아기 공룡 둘리의 주제가를 듣게 되었다. 그런데 1절을 미처 다 듣지 못하고 그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말았다.


일억 년 전 옛날이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엄마 찾아
우리 함께 떠나자


  아니… 어떻게 애랑 엄마를 일억 년씩이나 떨어뜨려 놔요? 일면식도 없는 땅에다가... 잔인해라… 무지갯빛 동심의 세계가 한순간 아동 학대 현장르포로 변했다. 호이 호이가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 주문이었다니. 지금이야 “둘리 노래 듣고 울은 썰”이랍시고 웃으며 이야기하지, 당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그때 내가 경험했던 우울감을 표현하자면, 부정적인 감정의 폭이 지나치게 넓어져서 이전에 1만큼 느끼던 것을 100의 강도로 때려 맞는 느낌이었다. 외부 세계로부터 나의 감정을 보호하던 탄탄한 피부가 얇은 비닐처럼 투명해지고, 도처에 산재한 모든 슬픔들이 여과 없이 내면으로 흘러 들어왔다. 공감 능력이 병적인 수준으로 커져서 별의별 일에 다 감정이 이입되었고, 마음을 덤덤하게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사회면에 실린 안타까운 기사들은 물론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도 미리부터 슬퍼했다. 기쁠 때에도 다시는 이 순간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짙은 그리움을 느꼈다. 그러니 영구한 세월 동안 엄마를 그리워한 아기 공룡의 노래를 어찌 말짱한 정신으로 들을 수 있었겠나?


  우울증이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기분이 둥둥 떠있고 에너지가 넘치던 조증 시기가 좋았다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죽했으랴. 잠시 스쳐간 우울만으로도 그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병적인 우울은 처절하게 고통스럽다.


  감사하게도 나의 우울은 일시적이었고 마음도 점차 기능을 회복했다. 다만 그때 이후로 약간의 변화는 있다. 확실히 이전보다 눈물이 많아졌고 다른 사람에게 쉽게 공감이 되어서 약간 버겁기도 하다. 우리 엄마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아이 낳고 푹 삶아졌다”라고 하신다. 우울이 훅 치고 간 자리에 모성이 들어선 걸까? 그렇다면 다행.


  여하튼 우울증은 쉽게 볼 일이 아니다. 특히 기분장애 수준에 이르는 우울증은 실제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도 있다. 며칠 쉬면 낫는 가벼운 감기도 아니고, 나태나 나약함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흔히들 아주 힘든 일이 생겼을 때에만 걸린다고 오해하지만, 생물학적 요인으로 인해 뜬금없이 발병하기도 한다. 그러니 반드시 도움을 청해야 하고, 반드시 도와야 한다.



* 표지 사진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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