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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Jun 04. 2021

죽음준비를 생각케 하는 영화

P.S. I Love You



참으로 많은 외화가 한국에 소개되고 있구나, 하는걸 새삼 느낀다.

약간은 오래전에 개봉된 것 같은, 그러나 그당시엔 몰랐던 "P.S. I love you"를 보고 검색창에 쳐보니, 2008년 1월1일 한국에서 개봉됐다. 사진도 찾아보고, 인터넷 리뷰들도 훑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이 영화의 중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Ireland에 대해서 조금 들여다봤다.


영국밑에 있는 섬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우리나라의 제주도쯤 되나 했는데, 이런 무식이 오랜만에 깨졌다. 아일랜드도 공화국이며, 그들만의 정부가 있는 독립국가라는 사실. 사실 영국이 오랫동안 여러 나라(캐나다 포함)를 지배해왔기 때문에, 어떤 나라들은 아직도 영국의 복속국가같은 생각도 든다.


"P.S. I love you"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러브스토리이며, 이번에 러브스토리를 고른 이유는 "영어공부하기 좋은 영화"를 찾는 것의 일환이었다. 얼마전에 DVD로 본 "Last Chance Harvey"가 중년 남녀의 러브스토리로, 줄거리가 간단하고, 중년들답게 천천히 말하는 것등, 영화로 영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 추천할 만한 영화였다.


"P.S. I love you"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첫 장면부터 사소한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는데, 말이 빠르기가 말들이 초원을 지나가는 것 같다. 말장난에 가까운 그런 말의 소나기를 한차례 맞았다. 그러고는 "영어"는 포기하고, "영화"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뉴욕의 한 아파트에 사는 홀리와 제리. 가족모임을 다녀온뒤 격렬하게 말다툼한다. "애"를 낳자고 하는 남편과 "애를 잘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먼저 갖춰야 하지 않느냐. 이보다는 큰 아파트에서 애를 키워야 한다"는 아내. 결국엔 "네가 원하는 게 뭐냐? 내가 나갈까?" "그래? 나가겠다고? 나가버려!!" 이렇게 이가 안맞는 싸움끝으로 싸하게 냉기가 도는 아파트... 그런데 조금 있다, "자, 이젠 됐지? 우리 끝난 거지?"하면서 들어서는 남편, 그리고 그런 남편에게 뛰어 안기며 "쏘리"를 연발하는 아내... 이들의 화해에 마음을 쓸어담는다.


그러곤, 영화의 서막을 알리는 사인이 올라온다. 길게 줄지어 올라오는 나오는 사람들... 이미 영화가 본론에 들어선 것 같은데, 화면이 싹 변했다. 까만옷을 입는 사람들이 모인 죽은 사람을 위한 추도식.. 제리(남편)의 사진이 탁자에 있고, 하나둘씩 가족들이 모여든다. 그녀의 남편은 뇌종양으로 죽었다는 걸 알게된다.



"애"냐 "아파트"냐 하고 싸웠던 젊은 부부가 이제는 한명은 이승에, 한명은 저승에 있다. 시작하자마자 영화가 끝나는 느낌.  남편의 흔적을 잊지못해 애타는 홀리에게 생일케잌이 배달된다. 그리고 그안에 꽂혀있는 카드. 죽은 남편에게서 왔다. 그녀의 상실감을 쓰다듬고, 그녀를 위로한다. 그후로 제리는 때때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다. 노래를 좋아했던 그녀에게 친구들과 함께 가라오케바로 가라고 채근하고, 그와 그녀가 함께 했던 일들을 회상나게 한다.


나중에는 그녀의 친한 여자친구들과 남자의 고향이자, 그들이 처음 만났던 아일랜드로 여행을 가라는 편지가 온다. 이 역시 남편이 죽기전에 부인을 위해 여행사에 사전예약해 놓은 것. 그녀는 그곳에서 남편과 이미지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하룻밤 지내게 되는 이상한 경험도 하게 된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남자는 남편의 친구였고, 자기 부인과의 만남을 미리 예견한 듯.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중 하나는 홀리의 엄마. 그녀 역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사람. 두 자녀를 키우며 그 시간들을 이겨냈다. 엄마는 딸이 같은 길을 가는 것을 못견뎌하지만, 그녀가 치르는 홍역을 옆에서 지켜보며, 딸이 제자리를 찾기를 원한다. 어린딸을 채간(?) 사위를 이뻐하지 않았던 그녀. 그러나 죽어가는 사위의 간절한 요청을 물리칠 수 없었다면서, "마지막 편지"니까 이 글을 읽고 이제는 현실로 돌아오라고 당부하는 엄마.


이런 와중에 "전에 사귀던 여자들로부터 상처를 받아 약간의 정신병적 문제"가 있는 다니엘과 홀리는 특별한 만남을 이어간다. 다니엘은 순진하고, 단순해서 홀리의 친구가 되지만, 그도 "나도 한 여자에게 제리가 되고 싶다"고 그녀의 애정을 요구한다. 그 남자와의 사랑을 이뤄내는 날, 홀리에게는 더이상 제리가 나타나지 않는다. 제리의 마지막 편지에는 "나의 인생은 너와 함께 완성됐지만, 너는 이제 한장을 끝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홀리는 구두 디자이너로서 일을 시작했고, 다니엘과의 사랑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죽은 남편의 사랑에 힘입어서.


내가 잡은 명대사는 이거다.


(다니엘) "I don't mean to throw this at you but what do women want?

(홀리) "We have absolutery no idea what we want."


다니엘은 여자들에게 치댄 경험이 있다. 누구나 자신을 이용하고자 했다. 순진한 그로서는 여자들의 속마음을 알수없다. 그러니, 여자들이 원하는게 진짜 뭔지 그것이 궁금하다. 홀리는 자신이 제리와 싸울때 "애를 원하느냐", "애를 원하지 않느냐" "더 많은 돈을 원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원하는 게 진짜 뭐냐 하는 제리의 질문을 받는다. 홀리는 이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못한다. 애를 원하지만, 아직 완벽한 환경이 안되고, 완벽한 환경을 위해서 직장에 꾸준히 붙어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고. "네가 원한다면 투잡(two job)이라도 뛰겠다"는 제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위의 대화는 서로간에 그런 소소한 감정들이 배여있는 것이다. 제리가 죽고난 다음에야, 그런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이었는지 알게 된다.


눈물과 감동이 비례한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몇번 울었다.  홀리가 켕한 눈으로 제리의 음성메세지가 녹음된 전화로 자꾸 전화시도를 할때, 이젠 네가 불끌 차례야, 하고 눈을 감았는데, 누구도 옆에 없을때, 죽은 사람으로 치부해서, 내속에서도 재빠르게 그의 자리를 치웠는데 그의 이름이 씌어진 편지가 배달됐을때... 눈물을 흘릴때마다, 아직도 내가 예민한 감정의 소유자라는 게 놀랍고 고맙고 그렇다.(그러니 좋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지..)


이 영화가 내게 신선했던 것은 "제리의 투병기가 완전히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죽도록 싸우고 죽도록 사랑하다가 한사람이 병에 걸려 그 죽음으로 가는 길을 그려야 할텐데, 그의 아픔, 그의 치료, 그의 연약함 등은 영화에서 단 한씬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죽음의 와중에 자신의 고통은 뒤로 하고, 남겨진 사람이 겪을 고통을 미리 알고, 그를 위해 준비했다는 것, 그걸 상상하니, 그 부분의 감동이 컸다. (나중에 편집처리된 장면에는 제리가 암치료를 받으며, 병색이 짙은 얼굴로 아내와 친구들을 위해 여행사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있었다. 그 장면을 삭제한 것은 영화를 살리기 위해 중요했다는 걸 알게 됐다) 죽어가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남겨진 사람을 위한 영화, 그 본분에 충실한 배우들.


제리의 편지는 마치 홀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는 것같이 기술된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지?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 나가라. 그리고 즐겨라. 노래하고 싶지 않지? 그래도 노래하러 가라... 새 남자 만날 준비가 됐니? 그래야 한다...


나보다 나를 더 잘아는 그사람, 그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 혼자였는데, 누군가 처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을 느낄때 사랑의 호르몬이 흘러내린다. 가족에게 사랑받는 것과는 조금 다른 맛으로 말이다.


기침소리로도, 몸짓 하나로도, 때와 시간에 따라서 상대방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부부살이라고 생각한다. 죽어가면서도 아내가 처박혀있을 그 웅덩이를 알고 있는 제리의 혜안이 뛰어나다. 제리는 편지를 통해서, 그녀가 다시 세상밖으로 나오도록 돕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말없음"으로 처리한 제리의 고통 때문에 관객들은 역설적으로 슬프다.


누구나 죽음을 앞두게 된다. 어떤 사람은 죽는줄 모르고 죽을수도 있지만, 요행이도 죽음의 날짜를 받아놓는 사람들도 있다. 암이라는 병의 친절한 면은 "죽을 날"을 대강 알려준다는 데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고통은 언제나 떨리고 두렵지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을 이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에, 살기 위해 온 시간을 소진하다가, 죽음에 이른다면 그것도 "손해보는 죽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죽음준비에는 많은 것이 포함될 수 있을 것 같다. 남겨질 사람들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제리식" 죽음준비도 중요하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리는 나를 위해서 한다. 그리곤 죽음앞에서 남은 숙제가 많지 않도록 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교과서적 해답에 이르게 된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유서"를 써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언제 내게 병이 올지,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 것이 확실하다. 시신 처리문제와 장례절차까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할텐데. 유서로 인해 남겨진 사람들이 분열되는 일이 없도록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때가 되면 주변인들과 대화를 해놓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이 영화는 2004년에 발간된 세실리아 아헴(Cecelia Ahem)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세실리아는 어렸을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해서 오랫동안 글을 써왔는데, 그 엄마의 권유로 출판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때가 그녀 나이 22살. 어린 그녀가 그린 상상력의 깊이에 놀란다.  그녀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고,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단다.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게 이 책의 목표라고 말한다. 그래서 투병기나, 죽음에 연연하지 않고, 살아갈 날들이 남은 여자에게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죽음앞에 너무 많이 꾀병부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나만 당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또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므로.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죽음의 준비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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