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0달러가 들어갔다구?
"우리는 행복한 이씨네 딸들입니다" 첫 화로 생각하고 쓴 이 글이 실수로 연재에 포함되지 않고, 일반글로 발행이 되었습니다. 시카고 여행을 중심으로 글이 풀어질 것이기에, 순서가 잘못되었지만, 지금이라도 등록합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2화가 될 이 글이 의도상으론 1화인 게지요.
이제 결산을 해야지, 애저녁에 잊어버렸던 청구서가 언니로부터 날아들었다. 트럼프 이후로 흉흉한 뉴스속에 있는 시카고를 방문한 지도 벌써 이주일쯤 되어간다. (글을 시작한 뒤로 또다시 2주 이상 흘렀나 보다)
시카고에 가면서 동생이 크레딧 카드로 지불했기에, 동생이 쓴 돈이 모두 얼마인 것을 알려달라는 말이었다. 동생도 삶에 바빠 잊고 있었는지, 그때서야 주섬주섬 내역서를 보내줬는데, 개스비는 180여불, 그리고 대표로 동생의 전화만 로딩하기로 했었는데, 그 전화비가 $144불이었다. 개스비는 너무 적게 나온 듯했고, 전화비는 너무 많이 나와서 놀랬다.
이 개스비에 첫날 개스를 꽉 채웠던 언니의 지불 $55달러가 추가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계산을 마쳤더니 7박8일 3인의 여행 경비가 400달러 미만이 나왔다. 더 놀라운 것은 시카고에서 만난 세째언니와 형부가 기름값하라면서 미화 $300달러를 주셨는데, 이를 캐나다화로 환산하니 $420이 되어 우리의 모든 경비는 0달러가 되었다.
물론 미국에서 개인적으로 쓴 돈은 제하고서 말이다.
시카고 여행은 오로지 물질적 정신적 사랑만 받은 완벽한 여행이었다.
이상 끝, 해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어떤 일들이 있었나 기억의 바늘을 돌려보는 것이 나의 놀이터 브런치를 위하고, 사랑을 베푼 사람들에 대한 예의일 것같다.
그러고보면, "완벽"이라는 말을 잘쓰는 편은 아닌데, 여행에서는 저절로 나오곤 한다. 더 이상이 될수 없었을 것 같은. 그 나름의 상황에서 최고의 시간들을 보냈다는 마음, 이번 여행에서도 입증이 되었다.
시카고를 마지막으로 다녀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시카고에는 세째언니네와 동생네가 살고 있어서 엄마를 모시고 몇번 다녀오기도 했지만 최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을때 엄마가 있는 캐나다로 시카고 가족들이 방문와서 서로 내왕은 하고 있었다.
언젠가 시카고를 갔을때, 모두 삶에 바쁘던 때였는지, 조금은 실망하기도 했다. 캐나다에서 시카고를 가려면 국경을 통과해야 하고, 중간중간 쉼을 갖다보면, 12시간쯤 걸린다. 그렇게 도착했던 어느날, 집에는 조카의 아내만 있을뿐,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고, 장소가 잘못되었다고 했던가, 장거리 운전자들이 다시 지도를 펴들고 만날 곳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당시만 해도, 스마트폰도 없어서 우리가 며늘네 집으로 잘못 찾아갔던 것 같다. 언니 형부가 살던 집을 아들한테 주고, 언니네는 새집으로 이사갔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방문온 둘째언니를 싣고, 내가 주운전자로 갔는데, 집앞에 도착한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 세째언니가 내입옆에 낀 백태를 보면서 깔깔 웃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됐을까, 하면서 심심하면 그를 도마에 올렸는데, 자매들을 싣고 긴 운전에 긴장했던 나는 웃음보다는 위로와 따뜻한 환대를 기대했던 것같다.
그런 기억들 뒤로 서울쥐를 찾아가서 실망한 시골쥐처럼 시카고 가족들이 오면 반갑게 맞이하고 다시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게 됐된 것 같다. 그랬는데 시카고에 또한명의 동생네가 합류하게 됐다. 매릴랜드 한인교회 목회를 맡아 떠났던 제부는 그곳에서 시카고 신학교에 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 벌써 5년여가 된다. 남편을 따라 동생도 떠났고, 가족들이 원거리(캐나다와 미국)에 있어서 애뜻하게 지내고 있다.
동생은 토론토에서 심리상담사로 길을 닦고 있었는데 그 자격증을 미국에서는 써먹을 수가 없었지만 부부는 그것을 감수했다. 제부는 동생이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동생은 미국에 있는 동안 시험에도 통과하여 미국 자격증까지 소지했지만, 비자가 안나와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갈때쯤 워킹 퍼밋도 나왔고, 잡 오퍼도 받아서 일을 시작하기 바로전이었다.
동생은 자신이 시간이 있을때 오면 즐겁게 놀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내년에는 남편의 학교가 뱅쿠버로 옮기게 되니, 시카고에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우리는 동생이 오랄때 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장거리 운전에 조금씩 길이 든 자매 셋이 번갈아가며 운전하면 가지 못할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뉴스속에서는 시카고는 가면 안될 땅이었다.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에 반대하여, 시위가 일어나며 유혈사태도 있다는 뉴스를 들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여행지로서의 미국은 절대로 가지말아야 할 곳으로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와중에 우리는 미국을 가기로 한것이다.
가는 길은 순조로왔다. 국경에서도 큰 제지없이 자매를 방문한다고 하니 무사통과였다. 시카고는 시간상으로 토론토보다 1시간이 빨라 아침 7시에 떠났는데 시카고시간 6시 조금 넘어 도착했던 것같다. 처음 도착해서 벨을 누르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집에 아무도 없는가, 실망하는 찰나, 전화 소리를 듣고 동생부부가 환한 얼굴로 나타났다. 4채가 묶인 타운하우스였는데, 옆집 문앞에서 초인종을 눌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네 집은, 1층에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부엌옆에 다이닝실을 서재로 만들어 집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해놓고, 넉넉한 크기의 방 두개가 있었다. 햇빛이 많이 들어오는 거실과 한편에 큰 식탁이 있어서 많은 사람도 수용할 수 있는 안락한 곳이었다. 외국에 선교사로 많이 다녔던 그들 부부는 조금은 독특한 실내장식품도 있었고, 소파가 아주 편안해보였다. 포니테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녹색 식물이 머리를 빗은 아름다운 여인처럼 치렁치렁한 긴머리를 늘어뜨리고, 주위에서 받았다는 보기좋은 식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분위기좋은 상담센터에 들어온 기분도 들었다. 우리들이 모두 감동을 하니, 동생은 이곳에 방문오는 친구들이 위로를 많이 받고 간다고 말해줘서 자매들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자신들의 본집은 아니지만, 좋은 주인을 만나서 정을 들이며 살고 있다면서.
예전에 방문했던 시카고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른 잘 정돈된, 조용한 주택가였다. 타운하우스가 각진 모습으로 늘어진 아파트 스타일이 아니고, 큰 단독주택같아서인지 방갈로의 느낌이 났다. 두집은 2층에 두집은 아래층에 살게 건축되어 있었다.
무엇을 보기위해서 간 여행이라기 보다는 자매들이 사는 모습, 그들의 살림살이, 일상을 옅볼수 있는 그런 여행이었지 싶다.
첫날 조카 유나네 가족 모두와 세째언니와 형부까지 시카고 가족들이 뜨거운 환대를 해주었다. 수년전에 환대받지 못해서 아직도 비뚤어져있는 나의 빗장을 완전히 풀어버릴 정도의 뜨끈한 시작이었다.
캠핑장 예약도 되어있어서 나는 캠핑생각만 하면서 겨울잠옷만 가져갔는데, 한여름 날씨처럼 날이 푹했다. 이거 입고 자면 "물어죽을 거 같어" 하면서 잠옷을 흔들자 모두 깔깔 웃는다. 막내는 최근에 코스트코에서 샀다는 홀홀한 여름 잠옷을 자랑하는 것이 아닌가. 그걸 날쌔게 뺏으려다가 못하니, 동생이 안입는 옷을 가져다 준다. 내가 가져간 작아서 입지못하는 청바지, 옷등을 풀자, 동생1,2,3이 뺏아입으며 쟁탈전을 시작하면서 우리들이 드디어 모였다는 실감을 했다. 입지 않는 옷이 돌고돌아 주인에게 다시 돌아기기도 하게 되는. 내가 가진 옷중에 70%는 동생, 언니들에게서 온 것들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벌어진 우리들의 문신 세레모니. 막내는 미용사로 잔뼈가 굵었는데, 요즘은 눈썹문신도 가끔 한다. 아직은 돈받고 할 수준이 아닌지, 기회가 되면 우리들에게 시술을 해주고는 하는데, 차례대로 눕히고 눈썹을 문신해주는 와중에 보호용 까만 페인트를 칠해주는데, 그 모습은 개그우먼들 저리가라이다. 함께 뒹글게 되는 일주일간, 눈썹을 씻을 수 없어 고양이 세수로 버틸 극한과정을 자매들과 함께 한다.
염색이든, 문신이든 그런 것들을 멀리하는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는 언니만 빼고 어정쩡한 나는 동생들 힘으로 눕혀지고, 물들여지고, 그렇게 시카고에서의 첫날 아침이 시끌벅적하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