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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백일장

독곶, 그 바닷가 내음

by mindy

이민올 때 엄마는 짐을 줄여야 된다고 하시면서 사진첩의 사진들도 모두 떼어내서 앨범은 버리고 사진만 가져오게 하였다. 그동안 모았던 나의 사진들도 내가 가져오긴 했겠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며칠전 언니의 집에 갔다가 언니의 오래된 사진첩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 내가 담긴 사진들도 있었다. 옛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경험을 했다.


"이씨네"의 대장 아버지 이씨는 사실은 "이선생님"으로 불렸던 시골의 유지셨다. 우리들이 구김없이(?) 자랄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동네에서 존경받던 아버지의 배경이 컸다.


초등학교 선생이기도 했고, 사진관도 경영하고, 도장포를 경영하기도 했던 만능맨 아버지는 많이 낭만적인 분이셨다. 우리 자매들이 거의 모두 문과 체질이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같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흠이 없는 그런 완벽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엄마의 속을 썩이는 "불륜의 시간"들도 있었다. 나는 나중에서야 아버지의 비리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엄마에 따르면 다른 여자에게서 난 아이도 있었다고 했다. 아니, 사귀던 여자에게 남자애가 있었다고 했던가, 이제는 두분 다 돌아가셔서 그 진실을 알기는 어렵게 됐다.


아버지에게서 배신감을 느낀 엄마는 또다른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렇게 원하던 남자아이가 홍역에 걸려 사망한 사건이었다. 우리에게는 배다른 오빠(장남)가 있었고, 오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결혼해 오신후 계속 딸을 낳아서 6번째 남자아이를 출산했는데, 2살쯤 그 아이를 잃게 된 일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니, 그냥 주워들은 것으로 말한다면, 그 당시가 엄마, 아버지에게는 가장 위기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의 괴로움으로 빠져들었는데, 아빠가 어딘가로 사라졌는데도 엄마는 찾지 않았다고 했다. 그랬는데, 아빠가 식중독인가 걸려서 죽게 되어서 집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엄마 말로는 "그때서 정신이 확 들었다. 아들 잃은 것에 빠져서 남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남편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내가 할일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빠는 여름방학이면 우리들을 데리고 만리포에 데리고 가셨다. 그곳에서 구멍가게 비슷한 것을 하셨던 것같다. 사진찍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 덕에 우리 자매들은 수영복 입은 사진들도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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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70년대 초반, 오른쪽 사진은 79년도 찍은 것이라 나온 것 같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은 1남 10녀이다. 1남은 엄마가 키우셨지만 낳지를 않았고, 큰며느리가 들어오면서 엄마와 갈등이 있게 되어서 우리들과도 소원해지기도 했다. 이민오면서 엄마가 사시던 집을 오빠에게 주지 않고 이민자금으로 쓰게 된 사연 때문에 더욱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오빠와 올케는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는 오빠도 돌아가시고, 집안의 씁쓰레한 역사가 되어간다.


자식이 워낙 많다보니, 자매들끼리도 어울림이 많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오빠를 빼고 5번부터 10번까지가 막역하다. 그 이유를 언니의 사진첩에서 찾게 되었다.


고향 대산의 독곶리에 있는 황금산에 가서 가족 백일장을 했던 사진이 있었다. 1982년이니, 벌써 43년전에 있었던 일이다. 바다를 주제로 우리 모두 글짓기대회를 했었다. 아버지는 그런 행사를 가끔 주관하셨던 것같다.


황금산 바닷가에서 바위틈에 각자 자리를 잡고, 끙끙대며 글을 썼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빠의 딸 큰 조카도 데리고 갔었다. 엄마가 아프면서 자매들이 자주 의논하면서 우리들이 가까워졌나 생각했는데, 예전부터 함께 했던 시간들이 쌓여 오늘의 시간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위 언니들은 모두 출가하여 집에 자주 못올때 였지 싶다. 우리들도 서울에서 살다가 추석을 맞이해서 집에 내려와서 하루 소풍을 떠났었다.


그 사진을 핸드폰에 저장해 놓았고, 오늘 아침 갑자기 아버지의 흔적을 느끼고 싶어 펼쳐보지 않던 오래된 문서를 꺼내보는데, 그곳에서 그날의 백일장 작품들을 찾았다. 문학적인 가치보다는 우리 가족의 역사에 남기면 좋을 것같아서 이렇게 적어보기로 한다.



바다
(10번 막내의 작품, 중2쯤 되었지싶다)

바람이다, 들린다, 아! 바다다.
지금의 이 감정을 "기쁘다"라고 표현하기에는 깊이가 없다. 그동안 너무나 그리워했던 그런 모습으로 날 반겨준다.
파도의 소리, 옷자락을 당기는 바람소리, 바위를 사이에 두고 하나가 둘이 되어야만 하는 바닷물의 울부짖음, 모든것이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다. 들린다. 이 모든 자유로움의 어울림이.쏴. 쏴. 쏴...

서울에 비가 많이 온뒤로 수돗물이 나오질 않아서 많이 고생했다. 다행히 우리집은 잘나왔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좀 힘들었나보다. 어느날 아침인가 학교를 가느라 만원 버스를 탔다. 많은 사람들이 뱉어내는 이산화탄소를 다시 마시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가지면서 어느 앉아계신 아저씨에게 가방을 맡기고 서있었다.

바쁜 시간의 쪼들림속에서 잡담할 여유도 서서히 없어져가는 생활인들이 탄 탓인지 버스안은 라디오의 잡음과 가끔 밀지말라고 기분 나쁜듯이 소리치는 것 이외에는 조용했다. 그런데 유독 밀가루를 바른듯한 하얀 얼굴, 새빨간 입술을 칠하고 곱슬곱슬한 라면머리에 빛나는 백을 든 두 아줌마의 목소리가 튀어난다. "글쎄, 우리애는 요즘 밥도 잘 안먹고 공부도 안하고 걱정돼 죽겠어. 아니 그런데다가 이번에는 글쎄 전교 3등을 했지 뭐니. 기가 막혀서. 전교에서 언제나 1등만 하던 애가 말이야" "어머 그러니? 우리애는 요즘도 계속 반에서 1등해. 그런데 글쎄 언젠가 그이한테 내 자가용 1대를 사달랬더니 화를 내고 그러잖니. 창피해 죽겠어. 요즘 글쎄 자가용 1대 없는 사람이 어딨니."

때마침 내릴 때가 되어 그냥 별 생각없이 내렸던 기억이 난다.

어저께는 서울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산에서 내려 대산에 오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느껴지는 분위기, 그리고는 기쁨.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다. 처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어디선가 본것 같은 얼굴들. 자리를 잡고 섰다. 앞에 앉아계신 할아버지의 두터운 입술로 부터 흘러나오는 "나의 말" 소리가 들린다. 젊은 새댁이 보인다. 검은 살결, 흰 블라우스 속에서 부끄러운 듯이 살포시 나오는 아기 엄마의 젖꼭지. 내가 생활하던 곳에서는 느낄수 없었던 것들. 예전엔 느꼈고, 꼭 느끼고 싶었지만 잃어버렸던 것들."나는 사람이다. 분명코 여기가 내땅이다"라는 확신과 함께 온몸으로 느껴지는 고향의 내음. 보이는 얼굴 한구석 한구석에 깊은 주름살과 깊은 한숨들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속에 숨어있는 따뜻한 정들은 나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었다.

쏴쏴쏴...
수돗물 소리에서 비싼 아줌마들로, 아줌마에게서 할아버지와 새댁의 말소리로, 그리고는 지금 내가 서있는 이 바다로.

눈을 들어보니 하늘이 보인다. 멀리 바닷물과 맞닿아 있는 하늘이 보인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의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눈앞에 펼쳐진 저 바닷물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한. 커다란 신발을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가, 그 물속을 들여다 보면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것이다.

내가 본 할아버지의 모습, 새댁의 모습, 비싼 아줌마들의 모습, 그리고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작도, 마치 백설공주에 나오는 요술 거울과도 같이. 하지만 아마도 저 물을 통한 것이 더 맑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너무나 커다랗다. 안겨버릴듯이.

바람이 차다. 긴팔을 걷어 올리고 있었는데 춥다는 생각에 팔을 내린다. 하지만 춥다고 생각하는 이 순간에도 따스함을 느끼는 것은 바다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이곳에 오길 잘했다.

커다란 사람이 되겠다. 따뜻한 사람이 되겠다. 도시 아줌마도 할아버지도 새댁도 모두 품을 수 있는 바다가 되고싶다. 가을 바다 경치가 아름답다. 멀리 갈매기도 보인다.


막내의 글을 다시 읽으며 그당시를 떠올린다. 결혼과 직업 때문에 서울로 떠난 언니들 뒤로 나는 일찍 서울유학을 했다. 교육계에 계신 아버지 덕분이었지 싶다. 초등 5학년때 큰언니집으로 왔고, 그때부터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나중에는 막내까지 서울로 왔는데, 이 글의 배경은 이때였던 것 같다. 방학이면 고향 대산으로 돌아가고, 그때서야 우리들은 길게 늘어지는 충청도 사투리가 들려오면, 내땅에 들어왔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막내 위로 바니는 아직 시골에 있고, 막내와 내 바로밑 동생이 함께 살던 때다.


나를 보내신 것까지는 부모님의 계획이었던 것 같은데, 동생들이 오게 된 경위는 내가 잘 모른다. 서울가겠다고 조르는 자식을 보내시기도 하고 공부를 잘할 것 같은 아이를 보내기도 했겠다. 지금와서 보니, 부모님과 가장 긴 세월을 함께 보낸 바니 동생이 우리중에서는 가방끈이 가장 긴 것을 보면, 아이러니 하기도 하다. 결혼한 언니집을 전전하다가, 나중에 우리끼리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다. 저 시기는 나와 동생 둘이 주인집은 큰방에 살고, 부엌을 같이 쓰는 작은 아파트 방 2개를 얻어서 자취할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지금도 동생들은 그 어린 나이에 혼자 도시락을 싸갖고 다녔고, 제대로 먹지 못했었다고 늦은 투정을 한다. 나는 대학생이었고, 성인이었기에 평범한 언니라면 동생들을 걷어먹이면서 살림꾼이었을텐데, 나는 그런 책임에 대한 압박감이 있었던 것같지 않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 멋있게 표현해봤자, 철없는 언니였던 것이 분명하다.


동생들에겐 눈물겨운 시간들이었고, 나는 여느 대학생처럼 친구들과 술마시고, 노는데 바쁘고,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장학금 타려고 눈을 헤번덕이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방학때 집에 내려와서 우울해서 방황했던 적이 있었다. 홀로 이리저리 쏘다니면서 무엇을 해야할지 잘 모를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기억이 난다. "너는 집의 가풍을 잘 모르는 것같다." 나를 지긋이 살펴보시면서 염려하셨던 것같다. 가정의 대소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서울물 먹은 딸내미를 걱정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아들을 낳느라고 딸을 많이 나았다는 주변의 시선에 당신은 "손이 귀한 집안에 들어와서, 시어머님이 하신 말씀 자손을 많이 낳으라는 말씀에 충실했다"고 항변하셨다. 아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간신히 얻은 아들을 잃은 슬픔은 얼마나 컸을까? 또한편으로는 그 아들에게 쏠렸을 사랑과 관심이 딸들에게 공평히 나뉘어서 우리들이 씩씩하게 살아내게 된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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