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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많은 그녀

그녀의 사랑에 감염되다

by mindy

다문화, 다국적이란 용어는 바니 동생 부부를 반쯤은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캐나다에서 소수민족의 하나인 한국인으로 살면서 만났고, 함께 신학을 공부했으며, 다문화에 대한 비전을 안고 신앙의 길을 걷고 있다. 이번에 동생의 남편이 재직하고 있는 트리니티 인터네이셔날 대학(Trinity International University)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삶을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오래전 제부가 캐나다 칼가리에 있는 프레어리 칼리지(Prairie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동생도 그학교로 공부하러 갔었다. 그전에 서로 마음이 맞았는지, 학교에서 공부하다 보니까 친해지게 됐는지 그건 잘 모르지만, 그 둘은 자연스럽게 결혼했고,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중이다.


제부는 공부가 끝날 즈음에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 아니다. 다른 일을 하고싶다"고 운을 띄웠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당시에는 잘 몰랐다. 아이들이 모두 어릴때 아제르바이잔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나라로 선교사로 떠났었다. 언어에 관심이 많은 듯해보였는데, 성경번역을 지원하는 선교단체인 위클리프에 가입해서 그곳과 협력하며 아제르바이잔이란 곳에서 선교사역을 했다.


선교중 토론토를 방문했을때 가족들이 큰 교통사고를 당한 적도 있었다. 그중에 큰 아들은 얼굴부상이 컸는데, 통통하고 예뻤던 얼굴에 수술자국도 있고, 한편이 조금 일그러져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동생도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사건사고 수습에 모두 매달릴 때 하루 동생이 머물던 곳에 가서, 황당한 그녀곁에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그들 가족은 어느정도 회복하고는 다시 선교지로 떠났다.


아제르바이잔의 한 부족마을에 자리를 잡고, 자신들의 언어로된 성경이 없는 곳에서 성경번역 일을 했다. 지역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알파벳을 만들고 했던 일을 어깨넘어로 흘러들었었다. 그곳에서 10년 선교사로 일하다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왔지만, 그 가족들은 공부를 하기로 결정한다. 온가족이 다시 시카고 트리니티 인터네이셔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아이들은 초중고를 그곳에서 공부하고 부부는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랬는데, 돌고돌아 제부가 자신이 나온 학교의 신학대학원에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이번에 갔을때 제부도 만났고 그가 일하는 대학을 방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학생이던 시절, 온가족이 머물던 기숙사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지만, 그때의 인상과는 많이 달랐다. 동생과 함께 캠퍼스를 돌다보니, 한국인들을 비롯한 다색 인종이 많이 눈에 띄였고, 또 동생이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역사와 전통이 서린 아름드리 나무가 많은 캠퍼스는 재정압박으로 신학교를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넉넉하고 풍요로워 보였다.


밖에서만 봐도 유려한 도서관 건물, 아름다운 연못가에 배치된 쉴곳, 십자가가 보이는 학교 교회당, 표정이 환한 학생들, 그리고 어느곳에선가 큰 회의가 열리고 있었는데,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학구적인 표정 등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급진 광경이었다.


제부가 일하는 교수실도 가봤다. 내게는 어려보이기만 하는 제부(동안이기도 하지만)는 처형, 처제에게 둘러싸여 작금의 교수현실을 이야기해줬다. 대학가가 등록학생수의 감소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데, 특별히 신학교는 더욱 더 그 여파를 겪고 있다고 했다. 교수들이 열심히 일해도, 경영하는 사람들이 잘 헤쳐나가야 하는데, 결국 신학교를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브리티쉬 콜럼비아 트리니티 웨스턴 대학(British Columbia Trinity Weston University)으로 넘기게 됐다고 말했다. 내년 가을학기부터는 그 학교로 모든 것이 옮겨간다는 것이다. 교수중에서는 그쪽의 오퍼를 받은 교수가 전체의 절반쯤이고, 그 오퍼를 받을지는 각자의 결정인데, 몇명의 교수가 가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연봉이 현재보다 훨씬 적아진 것도 갈 사람이 줄어들 요인이라고도 했다. 자신은 캐네디언이고, 밴쿠버에 아들내외도 살고있으니 남들이 보기엔 1순위로 이적할 사람처럼 보이지만, 학교에서 지원해서 신청한 미국 영주권을 기다리고 있고, 아내(동생)가 일을 시작하게 되어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제부는 목회학 박사학위 과정 총괄자로 일하면서 한국에도 종종 가고, 학교를 위해 쉼없이 일하고 있음을 들어 알고있다. 제부의 연구실은 한편에 책장이 있고, 아들이 사준 큰 컴퓨터 한대를 제외하곤 모두 학교에서 제공받은 것이라는데, 연구와 대화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그동안 학교를 지키려는 노력들이 결실을 맺지못하고, 다른 학교로 흡수되는 것에 대해서 교수사회가 어수선하다고 말했다.


KakaoTalk_Photo_2025-11-03-14-07-43.jpeg 트리니티 인터네이셔날 대학교 교정에서


바니 동생의 삶을 보면, 일반인의 삶과는 많이 다르다. 그녀는 남편이 목회자로 있었던 2년을 포함 총 7년간 워킹비자없이 미국에 머물러야 했다. 그녀가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곳까지 왔는데, 자신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그늘속에 있게 하셨는데, 워킹퍼밋도 나오고, 이제야 빛이 들어오는 와중에 또 남편의 움직임이 있게 되니, 고민이 큰것같다. 아직은 내년까지 시간이 있어서 생각중인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하겠다는 큰 그림 앞에,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들 부부는 다민족, 다문화라면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제부는 자주 흑인교회에서도 설교하고, 동생도 강연요청이 오는대로 많은 준비를 해서 마음이 아픈 이들을 돌보고 있다. 동생을 떠올리면 따뜻한 찻잔을 상대방의 손에 안겨주며,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마음을 살피는 그런 모습과, 상대방의 떨림, 감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부드러운 진지함이 떠오른다. 그녀는 최근에 "마음날씨"라는 팟캐스트를 오픈하고,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서 하나씩 업로드하고 있다.


자매들과 함께 방문했던 시카고 보타닉 가든(Chicago Botanic Garden)에서 사진을 이곳저곳에서 찍는데, 내가 막내와 바니에게 함께 찍어주겠다고 포즈를 잡으라고 했다. 물가 근처에 둘이 어깨를 맞대고 앉았는데, 갑자기 바니얼굴이 씰룩이면서 울음기를 보인다 싶다. 막내는 구김살없이 있는데, 그곁에서 몇번 표정연기에 실패하다 간신히 눈물을 머금은 두사람의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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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부의 연구실에서(왼쪽) 그리고 시카고 보타닉 가든에서 포즈를 취한 바니(오른쪽)와 막내동생.


바니는 하나밖에 없는 제 동생을 끔찍이 여긴다. 막내가 힘들었을 때 곁에서 내일처럼 도와준 바니가 없었다면, 막내의 삶도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런 때가 생각나는지, 바니는 눈물을 훔쳤다. 우리는(나와 언니) 동생들을 위해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기에, 넌 참 특별하다, 면서 놀림반, 경탄반 이런 말을 쏟아냈다. 바니는 자신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며, 이렇게 시도때도 없이 눈물이 나와서 문제라고 말했다. 그아이의 사랑에 감염된 사람이 많고, 나도 그중 한명이다.


이번에 동생은 새롭게 문을 여는 상담센터의 디렉터로 뽑혀서 프로파일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내게 부탁을 했다. 핸드폰에 의지해서 그애의 사진을 찍으려 노력했다. 사진사의 실력에 관계없이 찍는 것마다 그애의 온화한 미소로 쓸만한 사진들이 많았는데, 그애 말에 따르면 언니 동생과 함께여서 행복한 마음에 사진이 잘나오는 것 같다고 만족해했다. 실력있는 사진사에게 부탁했으면 더 좋은 사진이 나왔겠지만,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전문적이고, 살아있는 표정이어야 한다고 주문했는데, 딱 그런 모델을 만났던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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