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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게? 꼭 들어줘!

마지막 이야기를

by 월하수희

수련의 혼은 부유하는 중이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저 이승과 저승의 경계 어딘가에서 바람결에 스며들며 빛을 따라가던 중이었다.

그때


-바스락-


무언가를 밟았다.


그 옛날 저승사자가 아홉 번째 발을 떼려다 만 것처럼 지금 수련의 발끝에 무언가가 닿아 바삭대는 소리가 났다.

볏짚이었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붉은 부적 한 장이 ‘혼(魂)’ 자를 드러낸 채 울렸다.


-촤랑-


뒤이어 들려온 방울 소리.

그건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잊힌 듯, 그러나 지독히 낯익은 사람이 흔들고 있는 소리였다.

지훈이었다.


그의 신당 안은 숨조차 쉬기 조심스러울 만큼 고요했다.


사방에 떠 있는 부적들은 단 한 장도 벽에 기대지 않았고 일정한 간격으로 공중에 떠, 공간을 봉인하듯 선을 그리며 허공을 감쌌다.


부적은 총 아홉 장.


동서남북, 네 방향과 사방의 모퉁이,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은 신당 중심, 수련의 옷 아래 깔려 있었다.

부적의 중심엔 큼직하게 ‘魂(혼)’ 자가,

그 바깥은 ‘禁(금)’,

가장자리에는 사슬처럼 휘감긴 ‘煞(살)’ 문양이 촘촘히 이어졌다.


부적들을 잇는 붉은 줄은 수련의 옷가지를 동그랗게 감싸며 결계를 형성했고, 그렇게 외부와 단절된 지훈의 진(陣). 그리고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고자 하는 한 사람의 공간이었다.


지훈은 정좌한 채, 신당 중심에 앉아 있었다.

희미하게 피워둔 향냄새가 정갈히 놓인 수련의 옷섶마다 스며들어 감도는 기척처럼 번졌다.


-바스락-


볏짚이 울었다.

아주 작고 사소한 소리.

하지만 지훈의 몸과 무령이 동시에 반응했다.

수련의 혼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훈의 손 끝에 맺힌 무령이 촤랑— 하고 맑게 울렸다.

“수련아... 안 돼.”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이 순간을 기다렸지만, 기다리지 않았다.


수련아, 가지 마.”


그 말이 닿은 순간.

바람도 없는데, 수련의 옷자락이 살짝 들썩였다.

지훈은 숨을 삼켰다.

그녀는, 지금 이 안에 머물고 있다.


-촤랑-


다시 한번 무령을 흔들어 그녀를 부른다.

순간, 담대한 그의 심장을 찌르는 가느다란 목소리.

-지훈..이니?-


수련이었다.

울컥 눈물이 나올 거 같은 것을 겨우 참아내며 말한다.

“응 나야. 내가 여기 있어.”


-네가 나를 부른 거니? 내가 갇힌 거야?.-


“내가 너를 불렀고, 넌 거기 가면 안 돼 너도 알잖아 다시는 못 와.”


-왠지 그럴 거 같았어. 근데 이곳은 날 반기지 않아 다들 내가 죽었으면 좋겠데. 저곳은 내가 가야 할 곳이야-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신당에 휘몰아치고 고요했던 부적들이 펄럭였다.

지훈이 급하게 미간을 모으며 그녀를 불러 세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때문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교수님은? 어머님은?… 그리고, 나는.”


지훈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난 너 때문에… 살고, 죽어.”


지훈의 처절한 외침 뒤에 아주 잠시 고요함이 머물렀고 다시 가늘고 처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지막으로 고백할 게 있어.

네가 연주랑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알았을 때,

이미 난 어찌 돼도 상관없었나 봐.

… 그만큼, 나야말로

너 때문에 살고 죽을 만큼… 널 사랑했어-


수련의 마지막 말은 깊은 물아래로 가라앉듯, 조용히 흩어졌다.

무령을 쥔 지훈의 손끝에 힘이 스륵 풀렸다.


그 말, 그 오해, 그 바보 같은 선택이,

그녀를 이토록 멀리 데려왔다는 사실에

숨이 턱 막혔다.


“수련아… 연주는 그게 아니라,”


그러나 수련의 걸음은 지훈의 변명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나 보다.


방금 신당을 휘몰아쳤던 서늘한 바람이 그 걸음을 따라 쓸려나가듯 흩어지기 시작했다.


옷가지 위에 깔려 있던 볏짚들도 스르륵 밀려 나갔고, 바닥에 깔린 아홉 번째 부적이 드러났다.


그리고 부적의 가운데 ‘혼(魂)’ 자가 붉게 타오르듯 빛났다. 곧이어 부적 가장자리의 ‘煞’ 문양이 사슬처럼 웅크리더니, 바닥 전체를 번개처럼 휘감으며 퍼졌다.

쾅-


공기 중에 무언가가 막히는 소리가 울렸고,

수련의 혼은 마치 투명한 벽에 부딪히듯 멈췄다.

지훈의 주술이, 마지막힘을 다해 그녀를 끌어당긴 것이다.


“안 돼…!”


지훈은 무릎을 밀치며 일어났다.

손끝에서 무령이 떨어져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는 곧바로 뒤편의 작은 향합에서 은침 하나를 꺼냈다.


그 침은 이미 수련의 머리카락 한 가닥이 감겨 있었고,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스웨터 가슴팍에 은침을 꽂았다.


“수련아… 널 이 안에 묶을게. 잠깐만… 내 얘기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머물러 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붉은 먹물을 찍은 붓을 들어


'留魂符(유혼부)'


혼을 머물게 하는 부적을 새로 쓰기 시작했다.


‘수련아, 이제부터 네가 듣게 될 이야기는 연주와 내 이야기가 아니야. 이건 네가 지운 우리 20년 전 그날의 일이야, 죽을 때까지 몰랐으면 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네가 사니까, 지금까지 넌 그날을 지우는 선택으로 생을 택했지. 지금 넌 그날을 기억하는 것으로 생을 택하게 될 거야. 그러니 제발 진실을 듣고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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