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이.
수련의 집 앞에서 차를 세워두고 잔뜩 긴장한 채 서로의 다짐을 굳히는 두 여자.
“이번엔 그때처럼 봐주지 마. 기회는 한 번뿐이야.”
은정이 앙칼진 눈으로 은교를 몰아붙이며 팔뚝을 세게 꼬집었다.
“아야! 그때는 보는 눈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니까. 오히려 뒤지게 패니까 '그게' 쏙 들어가 버린 거 같았어.”
은교는 미국에서 수련을 무참히 짓밟았던 그때를 떠올리며 날 선 시선을 번뜩였다.
“그러니까 내가 한방에 기절시킬 테니까. 언니는 이걸로 잽싸게 목을 졸라.”
은교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나일론 끈은 유난히도 튼튼해 보였다.
은정이 호주머니에서 목장갑을 꺼내며 은교를 향해 씨익 웃는다.
“자살로 꾸미려면 이 정도 준비는 해와야지 달랑 그것만 가져왔어? 너도 참 한결같아. 오늘을 위해서 배워둔 태권도니, 무에타이니 그런 거나 잘 발휘해. 몸 쓰는 걸 잘하면 머리는 안 돌아가나?”
은정의 비웃음 섞인 이죽거림에도 은교는 어쩐지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들 손에는 간밤에 수련이 두고 간 그녀의 가방과 옷들이 담긴 쇼핑백이 들려있다.
수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누구일 것이냐?.’
수련의 생사가 지금 이들에게 달려있다.
잠시후-
어색하고 서먹한 기류가 흐르는 세 여자.
삼총사 사이에 이런 묘한 기운이 흐른 적은 처음이었다. 서로 눈치만 보던 은교와 은정.
수련은 어쩐 일인지 이들을 쳐다보지 않고 거실 바닥만 들여다보고 있다.
결국 은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는 어떻게 된 거야? 정남이 말로는, 아이, 뭐 걔 말로는!! 네가 먼저 씻으러 들어가서 지 딴엔 오케이 싸인으로 생각했데. 그런데 갑자기 네가 막 울고불고 살려달라고 그러기에 취했나 싶어서 그냥 재우려고만 했다던데?.”
수련은 여전히 바닥만 응시한 채 밤새 빈껍데기처럼 말라버린 몸뚱이를 바르르 떨었다.
그 반응을 보고 은교가 잽싸게 말을 이었다.
“그기 아니야? 뭐 잘못됐어? 무슨 일 있었어? 갑자기 너 데불고 간 남자는 뭔데? 누군데? 니 지금은 술 다 깼어? 제정신이야?.”
수련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글대던 분노가, 눌러오고 참아왔던 뜨거운 감정이 정수리까지 치솟았다.
이들과 눈을 마주치기 싫었던 수련이 결국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이들을 쏘아보며 토해내듯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아니! 제정신 아니다! 어쩔래? 나 미쳤어! 알잖아!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은교와 은정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수련이 이토록 진지하게 화를 낸 적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은교가 먼저 수련을 달래기 시작했다.
“아, 아니 우리가 뭘 어쩐다는게 아이고, 그냥 니가 걱정되가 그라는기지.”
“그래 수련아, 네가 두고 간 것도 가져다줄 겸 괜찮은지 보러 온 거야. 진정해.”
다시 고개를 숙인 수련의 눈에서 눈물이 투둑소리를 내며 한없이 쏟아졌다.
은교와 은정은 서로 마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미쳤어.. 정말 제대로 미쳤나봐.. 어떡해.. 나 정신병원 들어가면 우리엄마 어떡해..미친년 딸을 평생 돌봐야 하는 우리엄마 마음 아파서 어떡해..”
은정이 눈썹을 찌그러뜨리며 은교에게 나가자는 사인을 준다.
은교는 잠시 은정의 눈치를 보다 수련의 눈물로 젖은 손을 꼭 붙잡았다.
“아이다, 니 정신병원 갈 일없다. 내가 그건 약속할게. 울지마래이. 하룻밤 사이에 빼다구 만 남았네 가스나. 지금은 잠을 좀 자야 할거 같으니까는 우리는 갈게. 뭐 좀 먹고 잠 좀 푹 자. 물 많이 마시고 그라믄 괜찮아질끼야. 알았제? 물 꼭 많이 마시래이.”
은정의 얼굴이 일순간 화르륵 타오르는 듯했다. 은교를 향해 불화살 같은 눈빛을 쏘아댔다.
애써 은교는 그 살벌한 눈을 피해버렸다.
그때 마침 수련의 전화기가 울리고 은교는 말을 돌렸다.
“니 전화 아까부터 오는데 일부러 안받는기야?.”
수련은 대답이 없었고 그들은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
은정의 빠른 걸음 뒤에 죄지은 사람처럼 쭈굴한 자세로 따라가는 은교.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훽 뒤를 돌아보고 은교에게 쏘아붙였다.
“뭐? 잠 푹 자고 물 많이 마시라고?? 너 누구 편이야? 약 깨라고 아예 수액이라도 놔주지 그랬어?.”
은교는 연신 쭈굴한 자세로 변명하듯 중얼거린다.
“아니 어차피 이미 다 깬거 같고…. 저 상태라면 불쌍하잖아 쟤도.”
은정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생각에 잠겼다. 떠오르는 생각을 혼잣말하듯 은교에게 묻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 남자만 아니었으면 우리 계획대로 그 괴물이 정남이 앞에서 분명 모습을 드러냈을 텐데? 그 남자 뭐지? 그 남자는 괜찮았을까? 괴물을 안고 사라진 남자가 괜찮을 리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혹시 그 남자가 그때 수련이 말했던 같이 잤던 남자? 잠깐만. 언니! 나 아까 수련이 핸드폰에서 낯익은 이름을 봤어.”
은정은 은교의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으며 차를 향해 걸음을 계속했다.
“신지훈! 정확해 그 이름이었어.”
우뚝. 은정이 걸음을 멈췄다.
다시 뒤돌아보는 은정이 은교를 바라보는 눈빛은 심드렁하면서도 빈정거림까지 곁들여 있었다.
“재수 없게 그 이름이 갑자기 왜 튀어나와? 신지훈이 라는 이름이 대한민국에 하나뿐이야?.”
은교는 그래도 뭔가 할말이 있었다.
“아니 그때 얼핏 수련이가 보여준 남자가 무당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때 그 애도 무당집 손주 였잖아.”
이번엔 은정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온갖 짜증을 다 은교에게 다 퍼붓는 듯했다.
“자꾸 왔다 갔다 할래? 그래서 뭐 어쩌라구! 정신 차려! 우리가 아는 신지훈은 20년 전에 죽었어!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너도 저 물건처럼 미친년 돼가는 거야?.”
은교는 또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푹 숙였다.
그들이 돌아가고 수련은 계속 울려대는 핸드폰을 붙잡고 멍하니 앉아만 있다.
지훈도, 가영도 부재중 전화가 여럿이었다.
결국 가영은 수련의 집으로 찾아왔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꼴이 이게 뭐야? 김수련 너 진짜 주기적으로 사람을 못살게 군다.”
가영은 주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금세 죽 한 그릇을 만들어온 가영이 수련의 입에 떠먹여 주려 하고 있다.
그때까지 아무말이 없던 수련이 텅빈 눈을 들어 가영을 바라봤다. 온기가 가득한 죽 그릇을 들고 있는 가영의 손을 잡았다.
“교수님.. 저 사실은..”
수련의 간밤의 이야기와 현재 상태를 다 들은 가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좋은 머리를 빠르게 굴려 답을 찾아낸후 식은 죽을 휘적거리며 수련에게 내밀었다.
“먹어! 너 미친거 아니야. 분명 네 증상은 심각한 환각을 일으키는 마약의 한 종류일 거야. 소변검사로 나오지 않는 마약도 존재해. 특히 요즘 같은 때엔 말이지.”
가영은 오늘 아침 뉴스를 떠올리고 다시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지만 냉정하게 저울질하고 수련에게 할말을 한다.
수련이 가영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텅빈 눈에서 생기를 찾아냈다.
“소변검사로 나오지 않는 게 있어요? 정말이에요? 요즘 같은 때라는 건 무슨 말이에요?.”
가영이 잠시 곤란한 표정을 띄웠다가 결심한 듯 놀랄만한 이야기를 전했다.
“첫 번째 살해된 여자아이의 부검 결과가 나왔는데 위에서 초콜릿이 발견됐고 마약 성분이 함께 검출됐어. 그 마약은 현재 일본 정부에서도 골치를 앓을 정도로 유행 중인데 우리나라에도 빠르게 유통중이야. 문제는 이게 신종 마약이라 현재 소변검사 키트로는 검출이 되지 않는다는 거야.”
이미 가영의 첫마디에 수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창백한 얼굴이 더욱 사색이 되어, 얼어붙은 시선으로 무력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첫 번째 라뇨?.”
가영은 수련의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쉬고 무거운 얘기를 전한다.
“두 번째 아이가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된 채 오늘 아침 발견됐어.”
수련의 온몸에 털이 바짝 일어섰다. 순간 심장이 얼어붙고, 머릿속은 공허하게 정적이 흘렀다.
그런 수련을 깨우듯 안아주는 가영.
“네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아. 뭐가 됐든 너랑은 관계없어. 네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수련이 꿈을 꾸듯 흐릿한 눈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확실히 제가 해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 또 다른 아이가 초콜릿을 받아 드는 걸 봤어요. 막을 수 있었는데, 왜? 이번엔 자다가 나가지 않은 걸까요?.”
수련이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뭔가 떠오른 듯 가영에게 급하게 묻는다.
“두 번째 아이, 사망 시점이 언제예요? 정확히 언제 죽은 거죠?.”
“안타깝게도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 어제 자정쯤에서 오늘 새벽 두세 시 사이로 추정하고 있더라고.”
수련은 지금 붉은 실을 잡고 더 가까이 놈에게 다가가고 있다.
‘내가! 깨어있었어! 하필 내가 잠들지 않아서 그놈을 못 잡았어! 이제 알았어. 확실해졌어. 놈을 잡으려면 내가 잠들어 있어야 해. 근데 의식도 불분명한 내가 그놈을 상대할 수 있을까? 지훈아 네가 필요해.’
가영은 수련의 확연히 달라진 표정을 보고 말을 전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래 수련아, 뭘 위해서든 살아!. 살아있기만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