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속담이 있다. 누구나 의지할 곳이 있어야 무슨 일을 시작하거나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소에게 비빌 언덕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나 다름없다. 매일 같이 농부의 손에 이끌려 농사일을 하던 소도 쉴 때가 되면 야트막한 언덕에 제 몸을 비비적거리며 기쁨을 얻지 않는가.
비빌 언덕은 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소가 제 등 비빌 언덕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람도 누구나 비빌 언덕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고 꾸려나가기 위해 굳이 힘든 것을 택하고, 굳이 어려운 일들에 파묻혀 살다가도, 여느 때가 되면 제 등허리 비빌 수 있는 곳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인 것이다.
<끝의 시작>
막다른 선택의 이야기
소설 『미드 나잇 라이브러리』의 주인공인 ‘노라 시드’(이하 노라)는 이야기가 채 시작하기도 전에, 아니 소설의 이야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자살을 택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행이 차근차근, 그러나 연속적으로 찾아오자 그녀는 살아가는 것보다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모님의 죽음, 사이가 틀어져 버린 오빠, 먼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 연락도 없는 유일한 단짝, 실직, 반려묘의 죽음, 약혼자와의 이별. 노라는 어쩌면 손 쓸 수도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 주변 상황들을 지켜보며 자신의 존재 이유 또한 그 틈에서 조금씩 흐려져 가고 있음을 고통 속에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사건이 일어날수록, 자신의 존재가 조금씩 지워지는 듯한 고통.
하지만 노라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죽음 이후에 그녀가 눈을 뜬 도서관으로부터 기적과도 같은 사건들을 불러온다. 노라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뒤에 갑자기 등장하는 도서관과 사서 ‘엘름 부인’은 생전 노라가 가장 존경하고 의지하던 공간이었고, 사람이었다. 왜 갑자기, 하필 이곳에 나타났는지조차 의문인 엘름 부인은 자신과 자신이 있는 이곳 도서관, 그리고 노라가 삶과 죽음 사이의 독립적인 어떤 공간에 위치 해 있다고 말한다. 이 도서관 안의 수많은 책들에는 곧 노라가 살아갈 수도 있었던 모든 가능성이 담긴 삶들이 이미 쓰여 있으며, 노라는 지금 당장 그 가능성처럼 무한에 가까운 수의 삶들 중 하나를 골라 살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그중 한 삶을 골라 계속 그 삶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도 한다. 그렇다. 도서관과 엘름 부인은 다름이 아니라 노라 그녀의 영혼이 묘사해낸 그 깊은 영혼의 의식 어딘가 였던 것이다. 즉, 노라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인스턴트 라이프>
삶을 행복으로만 환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노라는 도서관에 머무르며 수많은 삶을 거친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을 옭아매던 자신의 ‘끔찍한 삶’ 말고도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내심 궁금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릴 때의 재능을 살려서 수영선수가 되는 삶, 자신의 전공이었던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는 삶, 환경보호를 위해 빙하 연구가가 되어 북극으로 향하는 삶 등등. 그녀가 흥미 있어했고 지향했던 모든 삶, 그 외에도 그녀가 예상치 못한 만남과 사건으로 이어지는 삶들까지도 살아보게 된다.
노라가 삶에서 하는 선택이 그녀의 삶을 바꾸었던 것처럼, 그녀 주변 사람들의 상황 또한 그녀가 취했던 삶의 선택들이 다르게 나타날 때마다 마찬가지로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노라는 이 삶과 저 삶을 오가면서도 진정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녀는 여전히 스스로가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때문일까? 그녀는 여러 삶에서 많은 돈, 위대한 명예, 쏟아지는 인기, 긍지 높은 신념, 사랑스러운 연인, 만족스러운 야망의 성취까지도 경험했지만 그중 어느 것에서도 삶에 대한 목마름과 갈망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다른 삶을 여행하는 중에 큰 실망을 느끼면 반드시 도서관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도서관의 규칙에 따라, 계속해서 다른 삶과 도서관을 오갈 뿐이었다.
<잿빛의 자아>
인간은 과거의 존재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아직도 이 삶에서 저 삶으로 건너가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 있다. 그녀는 어떤 삶을 택하게 될까? 우리가 만약 주인공의 처지가 되었다면, 어떤 삶을 선택하겠는가?
후회, 선택, 기대. 이는 우리의 의지가 시간이라는 직선적인 흐름 안에서 해석되는 방식이다. 이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후회’인데, 소설의 주인공이 그러했듯 후회는 사람을 무기력하고 우울한 상태로 끌어내린다. 지난 과거들을 조목조목 따지는 것으로 비생산적인 성찰을 하게 하며, 자기 자신을 자책하게 한다. 게다가 이 후회라는 포악한 괴물은 그 덩치가 점점 더 커져 마침내 있지도 않았던 과거의 가능성을 만들어내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과거까지도 후회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경향이 크다. 이는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미래에 대한 기대가 컸고, 상상했던 핑크빛 미래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초라한 회색빛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문득 생각한다.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가 지금 같은 회색빛이었다고. 내가 바라고 소망했던 것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그것이 우리가 과거를 대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에 거는 수많은 기대의 공허한 반복이며, 동시에 우리가 여전히 과거의 그늘 밑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두고 탄식하는 이유이다.
<지금, 여기>
삶은 끊임없는 현재의 무대이다
이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내가 지금 상상하는 미래는 내가 그때가 되어 맞이하게 될 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미래에 담아내기에는 우리의 현재가, ‘지금 여기’라는 것이 너무나도 명료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 스스로를 과거로 보내 그곳에서 후회하기도 하고, 미래로 보내 그곳의 젖과 꿀을 잔뜩 가져와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지금 여기’에 있다. 나약하지만 강하기도 하며, 유일함과 동시에 하나인 존재로서.
그러니 때로는 현재에 머물러보자. 이제는 과거의 망령 같은 나를 벗은 다음, 더 이상 과거의 빛바랜 가능성 들을 동경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촘촘히 빛나는 나의 삶을 용기 있게 입어보자. 저자인 매트 헤이그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강렬한 메시지처럼.
“포기하지 마라! 감히 포기할 생각은 하지도 마, 노라 시드!” - 392p
<죽음의 죽음>
불타 무너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
주인공이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만으로는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직접 보지 않아도 나 자신이 하나의 주체로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삶 안에서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세상이라는 객체를 주체로서 살아가고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내가 아니던가. 그리고 ‘지금 여기’에 펼쳐진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된 내가 마침내 나의 살아있음을 사랑하는 순간, 소로의 말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선물이 된다.
자신을 정말 잘 안다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소중히 하며, 매 순간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현재에 감사할 줄 안다. 우리는 소설 속의 주인공을 옭아매었던 ‘과거로부터 오는 자신’에 대한 어두운 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백일몽에서 깨어나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새로운 눈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소설의 대미에 불타 무너지는 도서관 안에서, 노라가 자신의 삶을 되찾기 직전에 외쳤던 단말마의 한마디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온몸의 세포로 하여금 다시 살아 있게 한 그 담백한 사실처럼.
“노라는 그 진실을 서둘러, 하지만 종이 위로 펜촉을 꾹꾹 눌러가면서 확실히 적었다. 대문자, 일인칭 현재시제로. 그녀에게 가능한 모든 인생의 씨앗이자 시작인 진실, 예전에는 저주였으나 이제는 축복이 된 진실: 나는 살아있다.” - 385p
<날숨을 쉬고>
희망을 거슬러 희망하다
희망. 그것은 종교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철학적인 것이든, 인간 개인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아편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현재로서 살아가게 하는 힘이며, 내가 나로서 요동칠 수 있게 하는 지향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현재를 살아간다는 그 이유만으로 기쁘게 희망하는 자.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자. 그는 그것 만으로도 이미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라는 희망, 그리고 그 안에 가득 찬 내 삶으로서 주어진 무수한 가능성들. 그것들은 이어서 우리를 하나의 질문으로 인도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주체로서 그 질문 앞에 선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긴 물결을 가진 강과도 같다. 항상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으며, 헤라클레이토스의 잠언처럼 ‘같은 곳을 두 번 밟을 수 없는’ 현재이자, 깊고 어두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하늘을 향해 날숨을 쉴 수 있는 최초의 ‘나’이자 최후의 ‘나’이다.
<존재의 기쁨>
언덕이 꼭 핑크빛일 필요는 없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 비빌 언덕은 분명 나를 살아있게 한다. 나에게 위안을 주며, 기쁨을 준다. 하지만 비빌 언덕들이 수 없이 많더라도, 그 언덕에 등허리를 마음껏 비빌 소가 없다면, 그 언덕들은 다 무슨 소용인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하고, 살아가며,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이다. 또한 기뻐하고 슬퍼하며 우울해하고 즐거워할 줄 아는 자유이다. 나의 삶은 핑크빛이 아니다. 칙칙한 회색빛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로 빛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마침내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