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책을 만들어 드립니다
14
출간 기획안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갈까? 이름은 거창해 보이지만 내용을 보면 특별할 건 없다. 크게 세 가지이다. 책의 내용과 형태, 이를 만드는 비용에 대한 계획을 세워 보는 문서이다.
우선 책의 내용이 어떻게 구성될 것인가 계획을 세운다. 여기에는 기획의도(책을 출간해야 하는 이유), 이 책을 읽을 독자와 시장 상황을 분석하고 대략적인 내용과 목차, 그리고 이 내용을 집필할 저자의 프로필, 내용이나 형식이 비슷한 유사도서, 출간 일정에 대해 쓴다.
내용과 독자를 정한 다음은 책의 형태이다. 책의 형태를 보통 ‘사양’이라고 하는데, 이 사양을 정해 보는 것이다. 책의 크기(판형), 쪽수, 종이의 종류와 그 종이를 묶는 방식 등이다. 이것들은 책이 나오기 전까지 변경이 가능하다. 다만 책의 판형과 쪽수는 책의 내용과 분량, 독자 연령에 관계되므로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대략 정해 놓은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비용을 기획한다. 예상 정가, 인쇄비용, 저자의 인세 등을 분석한 제작비(제작비는 책을 찍을 때마다 드는 비용이다), 원고료, 화료(일러스트 등), 외주 비용, 내부 인건비 등의 개발비(개발비는 처음에 한 번 드는 비용이다) 등을 기입하여 책을 몇 부 팔았을 때부터 얼마만큼의 이익이 남는지 분석한다.
그런데 위 내용을 상세하게 수십 장 쓰든, 한 장에 간단하게 쓰든 기획안은 기획안이다. 사전에 시장 조사를 철저하게 하고, 목차를 그럴 듯하게 뽑고 유사 도서를 아무리 철저하게 분석해 놨어도 기획안은 기획안일 뿐이다. 저자가 샘플 원고를 쓰고 목차를 다시 정리하는 등 본격적으로 집필하는 순간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그때부터 편집자와 저자의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서로 얼마나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서로의 마음은 왜 그때야 알아지는 것일까? 기획할 때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기획이 연애라면, 집필은 결혼 생활이다. 기획을 하고 저자를 찾고 계약서를 쓰는 시간은 대게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다. 계획대로 책이 잘 나갈 거라고 굳게 믿으며 서로를 응원하기에 바쁘다. 저자는 출판사에, 출판사는 저자에게 서로의 장점을 칭찬하며 웃음꽃이 반발한다. 거기다 서로 마음이 정말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서로의 단점은 잠시 보이지 않는 저 구석으로 잠시 몰아놓는다.
하지만 집필이 시작되는 현실에 직면하면 곧 신경전이 시작된다. 이 신경전은 정확히 어디에서 시작될까? 작가는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이 있고, 편집자 등의 출판인은 출간하고 싶은 글이 있음을 구체적으로 아는 시점이다. 이 둘의 간극은 생각보다 커서 초기에 잡음이 있다. 그런데 작가가 쓰고 싶은 글, 출판인이 출간하고 싶은 글이 다가 아니다. 독자가 읽고 싶은 글이라야 한다. 사실 ‘독자가 읽고 싶은 글’이 신경전의 핵심이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또는 편집자가 생각하기에 ‘독자가 읽고 싶은 글’이 서로 다르다. 어떤 때는 저자의 생각이 독자의 생각과 비슷하고, 또 어떤 때는 출판인의 생각이 독자의 생각과 비슷하다. 독자의 마음을 미리 알면 좋겠지만, 그것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갈등은 한동안 계속된다.
그 분야의 전문가인 저자는 자신의 독자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이에 편집자는 저자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며, 일반적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동상이몽은 책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동상이몽은 계속되는 것이 좋다. 다만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닌, 독자를 위한 동상이몽이라야 한다.
기획을 한 이후, 집필을 하고 편집과 디자인을 거쳐 인쇄되기까지 책을 만드는 데는 평균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1년 간 좋든 싫든 저자와 편집자는 이야기를 나눠야 하고 함께 결정해야 하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이 시간은 서로의 생각을 일치시키는 과정이 아니다. 서로의 생각을 듣고,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해야 하는 시간이다. 둘은 같은 입장도 아니다. 그렇다고 상하관계도 아니다.
책의 주인은 분명 저자이다. 그렇다고 자기 멋대로 할 수는 없다. 저자 입장에서 편집자 등의 출판인은 한 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책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책의 형태를 갖춰 주는 일은 그들의 역할이기에 그들의 생각을 가볍게 여기지 못한다.
편집자 입장에서는 책의 주인이 저자라는 사실을 알며, 독자를 위해 형태를 갖춰 내는 일은 출판하는 이의 몫이자 책임이라는 점도 분명히 알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해서도 안 되며, 또 편집자의 생각을 따르기만 해서도 안 된다. 편집자도 자신의 생각을 고집해도 안 되며,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각자의 생각은 지키되,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듣고자 하는 귀는 열어 두면서 약 1년 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곳에 세상에서 가장 냉철하고 까다로운 그들의 독자가 지키고 서 있기 때문이다. 아, 이 얼마나 어려운 관계인가?
기획한 이후부터 작가, 편집자, 독자의 동상이몽은 계속된다. 그건 기획을 아무리 잘 세워도 피해갈 수 없는 관문이다. 서로의 생각에 깊이 있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깊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을 잘 들어주지만, 절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의 소유자인 당신, 책을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팔랑귀라 안 될 것 같다고요. 걱정 마세요. 하다 보면 소신은 자연히 생기기 마련. 똥고집만 안 되면 다행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