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책을 만들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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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각을 문자화하여 글로 쓰는 행위 자체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우선 혼자 읽기 위한 일기나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편지가 그렇다. 그러나 이 두 경우를 제외하면 ‘글’은 누군가가 읽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누구라고 딱 꼬집어 말하지 못해도 자신의 생각에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애원’이 깔려 있다. 말도 마찬가지다. 혼잣말을 제외하고는, 항상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며 또 듣고 있다는 전제하에 말을 한다.
그런데 이 애원의 마음이 실린 <글>은 <책>이라는 물질적 형태를 갖추기 전에 몇 사람의 몸을 통과한다. 물론 이것이 100% 꼭 필요한 작업은 아니다. 요즘 들어 자신의 작품을 직접 출판하는 작가들이 많아졌다. 발전된 기술을 통해 기존의 프로세스를 몇 단계 줄일 수 있어, 여러 전문가가 필요했던 과거에 비해 한 사람이 책을 만드는 모든 공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글>들은 아직 <책>이라는 형태를 갖춰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몇 사람의 몸을 통과한다.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고루 읽히기 위해 몸을 단정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과정이며, 세상에서 통용되는 문법으로 바꿔 주는 일의 일종이다.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의 말과 글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거친 다음에,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 일들은 누가할까?
원고를 보기 좋고 아름답게 꾸미는 디자이너와 그것을 어떻게 제단하고 제작할지 고민하는 제작자, 그리고 만들어진 책을 잘 팔기 위해 연구하는 마케터가 있다. 편집자는 이들과 더불어 원고의 전체 방향과 목적을 정하고 글을 고치고 다듬는 세부적인 일을 맡으며, 모든 사안을 조율하는 조정자 역할을 한다. 이들 각자의 역할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하나라도 어긋나면 책의 꼴이 영 이상해지고 보기에도 좋지 않다.
특히 편집자는 책이 나오기 전까지 작가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편집자와 작가는 글이 책으로 다시 태어나는 약 3개월에서 1년 동안 정신적으로 아주 긴밀한 교류를 나눈다. 그 둘 사이에는 공통의 목표물인 <책>이 있고, 그것을 향해 함께 달리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또한 그들은 아직 책이 되지 않은 원고를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는 공동운명체이기도 하다. ‘어떤 생각이나 글’은 한 사람(작가)이 짧게는 몇 년, 길게는 평생 공부하여 얻어낸 통찰이기에 양과 질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 고귀한 존재이다. 아직 글을 쓰기 전이라 아무것도 없는 상태일지라도 생각 자체로 값어치가 있다.
그 고귀함과 값어치는 아무나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편집자는 작가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사장될 뻔한 것, 실물 형태로 태어나지 못한 채 허공에 머물 뻔 한 것, 다른 <책>으로 태어날 뻔한 것들을 찾는 사람이다. 알아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한 준비를 작가와 함께 해나간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미디어나 인쇄물, 또 다른 형태의 어떤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한 순간도 타자와 소통하지 않는 순간은 없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상대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아는 것이 일차 목표이다. 그다음 필요에 따라 상대를 돕기도 하고, 스스로도 잘 모르는 그 사람만의 장점을 찾아주기도 한다. 또한 찾아낸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기도 하고 그 과장에서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편집자는 이같은 일에 가장 비슷하고도 가까운 직업인이다. 그들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속에서 가치를 발견한다. 그 이야기만이 가진 특별한 것, 그 이야기만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 그 이야기만이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거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 확신을 가지고 작가의 생각과 말이 <글>로, 다시 <책>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함께 지켜본다. 편집자는 이런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관심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생각의 가치를 발굴하여 세상으로 내 보내는 사람.
“당신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유난히 잘 찾아낸다죠? 그러니 당신이 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