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휴가를 내고 싶은 밤. 2024년 11월 17일 일요일. 평소보다 2시간 일찍 10시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낮에는 20도에 가까운 기온이 밤이 되니 영하 가까이 뚝 떨어졌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으니 코끝을 감도는 찬 기운과 이불속 온기가 기분 좋게 조화를 이루며 놀랍게도 금방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출근 준비를 하는 나를 보았다.
아침까지 통잠을 잘 못 자는데 신기하게 쭉 잔 것에 놀라며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와 양치를 하고 도시락을 챙겨 지하철역까지 갔다. 지하철이 연착되어 오지 않았다. 평소 10분 정도의 여유만 남겨놓고 출근하는 나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버스를 이용해 회사로 가는 일도 만만치 않다. 아침 출근길이 막히는 것을 생각하면 어차피 지각이다.
지하철이 정말 평소 타는 시간보다 8분 늦게 도착했다. 2분의 여유시간은 확보되었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지하철에 탑승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시간이 여유 있는 사람들은 타지 않고 그냥 계속 줄을 섰겠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얼른 최대한 몸을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했더니 문 입구에 선 여성분이 외친다.
“저 임산부예요. 밀지 마세요!”
아뿔싸, 그녀의 배는 임신 중기에 다다른 듯 보였는데 미처 보지 못했다. 일부러 밀었던 것도 아닌데 이내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눈인사로 가벼운 사과의 뜻을 전하며 최대한 피해 옆으로 내 몸을 최대한 구겨 넣었다.
평소 끼던 헤드셋을 가방에서 꺼내기도 비좁은 공간이었다. 멍하니 앞사람의 뒷모습만 보며 지하철이 이동하는 것을 기다렸다. 환승을 가장 많이 하는 역까지 그렇게 꼬박 20분을 가면 되는데 복병이 등장했다. 지하철이 다음 역으로 이동하지 않고 1분간 정차를 하면서 기다리겠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차라리 많이 늦게 되면 포기라도 하겠는데 조금씩 여지를 두면서 지연되는 지하철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안내방송과는 달리 약 2분간의 정차 후 다시 달려가는 지하철 안에서 휴대전화기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았다. 빨리 다른 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역사 내 로비를 있는 힘껏 열심히 뛰었다. 다행히 바로 갈아탔다. 거친 숨을 고르며 3개의 정거장을 지나 회사가 있는 역에 도착했다.
난관은 또 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라 4층까지 올라가야 출근 카드를 찍을 수 있다. 또다시 전력 질주. 그냥 뛰는 것도 힘든데 계단을 올라가야 하니 더 힘이 들어갔다. 다리는 욱신욱신, 가슴은 겁먹고 도망치듯 한없이 방망이질 쳤다. 목구멍에서는 약간의 피 맛도 올라왔고, 얼굴을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금만 더 힘을 내면 9시 안에 무사히 출근 카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힘내자!’
4층 출근기에 앞에 섰다. 표시된 시각은 ‘09시 00분’. ‘다행이다’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출근 카드를 태그 하자 야속하게 시간이 ‘09시 01분’으로 바뀐다. 거친 숨에서 허탈함이 묻어 나온다. ‘아~’ 외마디 탄식이 가슴을 찌릿하게 만들었다. 지각했다. 이렇게 마음 졸이며 뛰기도 승차 위치까지 계산하며 탔는데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뭐 지각이 대수겠냐?’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괜히 마음이 무거웠다. 누가 불러다 놓고 문책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머릿속에서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했다. 조금만 서둘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간 복잡한 마음이 교차하고 있을 때 기상을 알리는 휴대전화기 알람이 울린다. 그 순간 나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 ‘그럼 그렇지. 이건 꿈이었어.’ 20년 넘게 직장을 다녀도 종종 지각하는 꿈을 꾸는데 이날도 그랬다. 때마침 집안의 모든 전화기에서 안전 문자메시지가 온다. 무슨 내용일까 얼른 휴대전화기를 확인하니 철도노조의 태업을 알리는 문자.
-11. 18.부터 철도노조 태업으로 일부 전동 열차가 지연 운행 중이니 급하신 분들께서는 타 교통수단을 이용 바랍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한국철도공사]"-
여느 아침이라면 8시쯤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러 갔는데 지금 바로 나가지 않으면 꿈속의 일이 재연될 것 같았다. 7시 30분부터 집에서 나와 버스만 이용해 회사에 가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가며 거리의 버스정류장을 보니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고요해 보였다. 붐비지도 않았다. 괜히 겁먹고 버스를 탔나 후회도 들었지만 선택을 바꿀 수는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버스를 타니 새로 보는 아파트의 모습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다음 하차 정류장을 알려주는 안내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아파트 이름이 내 귀에 튕겼다. '린 파밀리에', '위버 필드', '리오 포레 데시앙'등 고급스러움, 자연성, 독창성을 강조하다 보니 지어진 이름인데 내가 어느 나라의 버스를 타고 있는지 혼란이 왔다. 한동안 지하철로만 다녀서 인식하지 못했던 도시의 변화가 체감되었다.
집에서 나온 지 1시간 후 드디어 회사에 도착했다. 출근 카드를 찍으니 8시 40분.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 직원의 카카오톡이 왔다. “지하철이 안 와서 저 늦습니다. 죄송해요”라는 내용이었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오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힘이 탁 풀리면서 조금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도 달인이 된 걸까. 이제는 예지몽도 꾸는구나 싶어서였다. 따뜻한 커피 한 잔부터 챙겨 마셨다. 부쩍 추워진 날씨로 찬 바람이 스며들었던 몸에 훈훈한 기운이 돌았다. 예지몽 덕분에 이 여유가 가능했다니 감사한 마음이 들다가도 매일 아침 20년 이상 지각 걱정을 했다는 사실이 어쩐지 애처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았다. 지각하지 않는 날이 더 많으니 더 다행스러운 날이 많은 것은 아닌가 하고. 토닥토닥 나는 20년 이상 이 생활을 잘 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