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고
어쩌면 인생을 살면서 가장 많이 듣고 가장 많이 해주는 말은 말이 아닐까. 한강 작가의 시집에서 맨 처음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시는 '괜찮아'이다. 시집을 사기 전 나민애 교수의 유튜브 강의('무용한'시의 쓸모)에서 처음 들었다. 이 시를 통해 초보 엄마의 지치고 힘들었던 기억과 부족하다고 느꼈던 자신의 모습을 위로받았다고 했다.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 나는 두 팔로 껴안고 /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 왜 그래./ 왜 그래. / 왜 그래. (중략) 그러던 어느 날 / 문득 말해봤다./ 누군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괜찮아> 중에서
나 역시 갓난 아이의 엄마였던 그때의 내 모습과 마주했다. 내가 낳은 아주 작은 어린아이. 그 아이가 우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말이라도 하면 속시원히 이유를 들어볼 텐데 아이는 울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자꾸만 묻게 된다. "왜 그래."라고. 무슨 말을 들을 수도 없는데도 왜 자꾸 물었을까. 그저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팽팽한 실만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흐르는 그 마음을 받아줄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아이의 마음과 내 마음을 다독일 "괜찮아"라는 말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괜찮아"를 많이 사용할까. 학교 가는 아침 주눅 들어 있는 아이에게, 새로운 일 앞에 실수가 두려운 나에게. 좋지 않은 일로 몸과 마음이 상한 상대에게. 누군가에게 들은 "괜찮아"라는 말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추운 겨울 온몸을 휘감는 이불처럼 든든하고 따뜻하다.
이 시집에서 건져낸 또 하나는 책 뒤에 적힌 전철 4호선에 대한 글이었다. 나는 처음에 이 시가 어디쯤 있을까 하고 목차도 보고 내가 놓치고 있었나 시집 전체를 뒤적이며 찾아보았다. 그런데 찾아지지 않았다. '이건 뭐지?' 하는 마음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시집에 실린 시가 아니라 작가의 글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블로그에 인용해 놓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처럼 매일 이곳으로 다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선바위역과 남태령 사이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는 것을 정말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지금은 너무 익숙한 데다 휴대전화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 탓일 수도 있지만 과거와 달리 신차일수록 전력 공급 방식의 변화가 늘 느끼게 된 데도 이유가 있다.
90년대 초 안양으로 이사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이 개통됐는데 처음 이 구간이 많이 신기하기는 했다. 작가의 글처럼 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 비상전력으로 밝혀지고 냉난방 공급장치는 꺼진다. 각종 기술이 발달하는데 이런 구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고, 경기도민들에게 일종의 영역 표시처럼 느껴졌다. '지금 서울로 진입합니다.'라는. 역사적으로도 남태령은 그 옛날 입신양명과 과거 급제를 꿈꾸며 걸었던 선비들의 진입로가 아닌가.
작가는 '덜컹거림'과 '속도 줄임' 그리고 '빛의 감소'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건너온 것은 무엇이었는지. 가속도를 줄이고 레일 위를 미끄러지는 13초 동안. 가정에서 회사로, 회사에서 집으로 나 역시 전력 공급 방식이 바뀌듯 나도 바뀌고 있었다. 선바위에서 내 얼굴을 비추던 조명이 잠시후 남태령에서 다시 정상화되어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왜 그래'와 '괜찮아' 그 사이 어디쯤, 경기도 '선바위'와 서울 '남태령' 를 지나는 13초 어디쯤. 나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달라지고 있었다. 어제도 달라졌고, 내일도 달라질 것이다. 변신의 귀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