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을 때 소년이 온다에 이어 이렇게 힘든 이야기를 또 시작하셨다는 점, 그 책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신 점을 이유로 박애주의자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너무나도 인간을 사랑하기에 모든 고통을, 타인이 주는 고통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그냥 둘 수가 없어서 글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당신의 상처를,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감히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어루만져주고 싶습니다. 내가 위로하는 방식은 기억하고 글을 쓰는 것 밖에 없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냥 내가 디 에센셜 한강을 읽으며 이런 느낌을 받았다.
또 그 아름다운 표현력에 또 한 번 반했다.
슬프고 우울하지만, 고통스럽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읽지 않을 수가 없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과 용기를 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향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 ㅜ 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 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희랍어 시간 17쪽)
수동타자기를 사용하면서 한글의 구조에 대해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네 벌식 타자기로 초성, 중성, 종성의 순서에 맞게 손가락을 움직여야 오타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희랍어 시간의 17쪽에서처럼 머릿속에서는 글자를 자음과 모음의 순서대로 분해한 모습을 떠올리고 입으로는 소리 내어 따라 하면서 타이핑하기도 했었다.
- 칼레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국어에서 '빛'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희랍어 시간 77쪽)
빛 이 밝음과 색채라는 두 가지 의미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맞아 정말 그랬지!!
-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꿈에서뿐이겠지요. 그때는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 세계가 감기는 거겠지요.
(희랍어 시간 179쪽)
-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 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 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희랍어 시간 195쪽)
이제 비를 보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
어떤 이야기가 내려오는 걸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쉼표와 물음표가 몸을 구부릴 수밖에 없는 상황, 문장을 생각해 본다.
디 에센셜 한강은 제목 그대로이다.
장편, 단편, 산문, 시
모든 페이지가 다 좋았다.
무엇이 더 좋았나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2013년에 돌아가신 고 최인호 작가님에 대한 기억이 담긴 산문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를 읽으며 아빠생각을 했다.
언젠가 아빠의 숙직실에 놀러 갔을 때
아빠의 외로움이 너무나도 짙게 묻어있던 그 작은 방 한편에 작은 책장이 있었다.
가톨릭 성경, 좋은 생각, 목민심서와 함께 최인호 작가님의 #영혼의 새벽 있었는데 아빠에게 그 두 권의 책을 빌려 읽었고 그 이후로 최인호 작가님을 떠올리면 우리 아빠의 외로운 방 작은 책장이 같이 떠올랐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속 따스했던 최인호 작가님의 순간을 읽으며 아빠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강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 인생은 아름다운 거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걸 영영 알지 못할까 봐, 그게 가장 큰 걱정인 것처럼 그렇게 반복하셨다.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3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