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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개미 May 26. 2020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7

2013 자유선언, 캐나다 교환학생


2013 자유선언, 캐나다 교환학생



“넌 캐나다 다녀온 후 변했어.”

“응?”

“좋은 쪽으로, 중학교 때 너 처음 봤을 때 미술 하는 애가 어떻게 이리도 보수적이고 편견이 심할까 생각했었지. 친구지만 가끔 너무 답답했었는데, 다녀온 후로 생각의 폭이 넓어진 것 같아.

다양한 방면에서 사람을 이해할 줄도 알고”     



7개월간의 캐나다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16년 지기 친구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그렇다. 지금 생각해도 캐나다 가기 전의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답답하고 앞뒤가 꽉 막혔었다.

아무래도 집안 환경이 남들이 보기에 답답한 아이로 자란 것이 아닐까 싶다.


나의 부모님은 엘리트셨다. 엄마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역사 선생님이 되셨고,

아빠는 S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가셔서 자신의 분야에서 멋지게 일을 하셨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교사였던 엄마에게  ‘악’이란 이런 것들 이었다.


치마를 줄이면 날라리, 머리 염색을 하면 나쁜 학생, 욕하면 나쁜 학생, 귀 뚫으면 까진 아이,

화장하면 나쁜 학생 아마 엄마가 소속한 학교에서 날라리 학생들이 ‘나쁜 것’의 표본이었던 것 같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위에 속하는 것을 한 사람들은 공부 안 하고 날라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나를 너무 사랑한 탓인지 항상 세상은 위험하다고 가르쳐 주셨다. 늦은 밤엔 나가면 안 되었고, 혼자서 여행은 더더욱 안 되었다. 또한 남자는 아빠 빼고 늑대라 조심하라는 말씀도 자주 해주셨다.


철석같이 그 모든 것이 위험하다고 믿었던 나는 부모님 말씀대로 남자는 다 늑대로 알았고, 밤은 위험한 것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여고를 나와서 남자를 무서워했다) 정말 착한 딸이었다.


오죽했으면 대학교 때 처음 사귄 남자 친구가 기숙사 주변으로 밤 산책하자고 불렀을 때

뾰족한 삼색 볼펜을 후드티 주머니에 챙겨 나갔겠는가?

그 용도는 30cm 정도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뾰족한 펜의 날을 세워 위협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남자는 늑대로 변한다고 했던 엄마의 말을 믿었었다. 하필 그날 보름달이 떴었다) 그 아이가 다가오자 뾰족하게 ‘딸깍’ 볼펜을 누르고 위협을 가했지만,

그 아이는 내가 귀엽거나 엉뚱하다고 생각하는 정도 같았다.


 뭐 그때는 21살이라 귀여워 보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 29세 먹도록 그랬음 어느 남자든지 도망갔을 것이다.

그 아이랑은 1년 동안 사귀었지만 (하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3개월일 듯하다)

.

.

.

뽀뽀도 못 해본 그 아이여. 불쌍하도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고 세상이 위험한 것이라 믿었지만 한편으론 그런 세상이 너무 궁금했다.

그 위험한 세상이 정말 위험한 것일까? 경험하기 전에 모르는 것이라 경험하고 싶었다.

‘자유’에 대한 갈증이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자랐던 것 같다.

온실에서 피어난 꽃이 비닐하우스를 뚫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가는 것과 같이.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사생대회 나갔을 때


7살부터 미술을 한 나는 은인을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났었다. 그분은 미술 학원 선생님이다. 그때 당시 선생님의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였던 것 같다. (곧 내가 될 나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될 때까지 4년 동안 그 선생님께 그림을 배웠었다. 2년간은 선생님 학원에서 그림을 자유롭게 배웠다. 어느 날 학원 건물주가 학원을 빼라고 하여 선생님은 어쩔 수 없이 미술학원 문을 닫았다.

그 후 선생님은 체인점 미술학원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게 되어 선생님을 따라 체인점 미술학원을 등록했다.



그 미술학원은 예전에 배웠던 자유로운 그림이 아닌 고등학교 입시 미술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수업방식은 이러했다. 사진 한 장이 랜덤으로 정해지면 4B연필로 똑같이 사진을 따라 그리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는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똑같이 그릴 거면 사진을 찍지 그래.’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 환경에서 애들을 기계처럼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도 힘들었는지 나에게



“개미야. 선생님은 이 학원 그만둘 거야. 너도 나와서 자유로운 그림 그리자.”


그렇게 선생님을 따라 체인점 미술학원을 그만뒀다. 그렇게 선생님은 다시 따로 자신에게 그림을 배울 사람들을 소규모로 모았다. 소규모로 모인 사람들은 다양한 연령대였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최연소였고

그 위로 고등학교 언니들 그리고 20대 후반인 직장인 언니까지 모여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며 그림을 배웠다. 아니 놀았다.



그 공간은 라디오나 샹송이 흘러나왔고 주변엔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 집이 꽂혀있었다.     

어느 날은 잡지에 나온 멋진 인테리어나 모델을 나무 합판에 아크릴로 그리거나, 무지 쿠션 위에 아크릴로 패턴을 그려 나만의 패턴 쿠션을 만들었다. 빨대로 샹들리에를 만들기도 하고, 색을 배우기 위해 요리를 하기도 했다.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기를 꼽자면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면서 규칙 없이 그림을 그렸던 그때이다. 우리에게 ‘예술적 자유’를 알려준 선생님도 자신만의 꿈이 있었다. 중국에서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린 딸도 있지만 꿈을 위해 35살의 나이로 한국 생활을 접고 중국으로 떠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용기였다.


서른 중반이면 어느 정도 자신의 인생을 잡아간 시점에서 모든 것이 

새로운 타지로 떠나는 것이다. 심지어 가족도 있었는데.  


스무살 후반인 지금의 나는 용기를 못 내고 있다. 

떠날 용기를.






오늘도 내일도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요.

@mingaemi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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