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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네마 Jun 03. 2019

프랑스 파리 생활기 #2 워밍업: 여행자 모드


공항에 도착해 미리 예약해둔 승용차에 짐을 싣고 드디어 파리에 있는 숙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비행기 안에서 잠을 거의 자지 못했지만, 바람이 볼에 스칠 때마다 느껴지는 맑고 선선한 공기에 설렘과 긴장이 고조되어 말똥말똥한 상태로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에펠탑이 보였다. 한 때는 모두가 반대하는 흉물에 불과했다는 이 회색 철탑이 백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그러고 보면 가치 있는 많은 것들 중 동시대에 인정받는 행운을 지닌 것은 오히려 더 드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에펠탑 그리고 고흐가 그렇듯. 어쩌면 나도? 아냐. 이게 무슨 과대망상이야. 급히 정신을 차리고 혼자 작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만 보면 나는 희극적, 비극적 양 극단의 방향에서 동시에 나르시시즘을 지니고 있다니까. 항상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아.(그래도 반성은 빠르다.)


6월 3일 어학원 수업 개강. 5월 27일 프랑스 도착. 무작정 떠나오긴 했지만 아무리 망상을 좋아하는 나라고 하더라도, 이번 기회가 어쩌면 일생에 다시없을지도 모르는 흔치 않은 시간, 귀한 시기임을 잘 알고 있다. 출발하기 전 한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 친구 Pierre를 만났을 때 "나 뭐든 열심히 해볼래!"라고 말했더니 "열심히 하지 말고 뭘 하든 즐기기만 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에 큰 위로를 얻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대충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배우든 즐기든. 이곳에 있는 동안 뭐라도 있는 힘껏 해보긴 해야 했다. 뭘 하면 좋을까. 출국 전 봤던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봤던 대사가 떠올랐다.


<무엇을 할 수 있었으며, 뭘 해야만 했을까. 무한한 가능성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고, 깃털처럼 자유로웠으며 불확실함에 버거워했던 그때>


문장을 되짚어봐도 아직은 너무나 막연하다. 이럴 땐 단순한 것만큼 좋은 해결책이 없지. 당장에 닥친 개강 전 일주일이라는 시간만 염두에 두어보자.


본래 우선은 일을 구하려 했다. 모아둔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출간했던 소설책의 인세가 소소하게나마 매달 들어오고는 있었지만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혼자 타국으로 떠나와서 있는 돈을 갉아먹기만 하는 형태는 스스로 머릿속에 그려봤을 때 그리 만족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다행히 프랑스는 미국과 달리 학생비자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주당 20시간까지는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준다고 해서, 이 곳에 있는 동안 가능하다면 공부와 함께 일도 병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그것도 다 경험이니까. 그렇게 첫 일주일은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는 데에 시간을 쏟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력서도 서른 장 가까이 출력해서 왔는데, 이게 웬 걸? 처음 봤던 아르바이트 면접에 덜컥 붙어버려 당장 다음 주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인식당이 아닌 프랑스 사람이 주인인 베이커리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을 가장 희망하긴 했지만 아직은 그만한 언어 실력이 아니라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두 가지 모두 아니고 조금은 뜬금없는 프랑스에 있는 한국 회사에서 현지 시장조사를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회사생활을 오랜 기간 하다 왔던 것이 좋은 인상을 남겨주었던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일찍 일을 구한 덕에 시간을 조금 벌었으니까 그 김에 다시 한번 이 도시를 슬렁슬렁 둘러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작년 1월, 같은 해 5월,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이전 두 번의 파리 여행에서 많은 관광명소들을 이미 둘러보긴 했지만 같은 장소라도 다른 시간이라는 요소가 섞여 들어가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제공해주기도 하니까, 우선은 갔던 곳들을 다시 가보고 싶었다.

앞으로 20000일쯤 더 매일 봐도 지겨워지지 않을 것 같은 에펠탑과 센 강. 미술 C등급이었던 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을 관람하게 만들어 주었던 오르세 미술관. 사방으로 뻗어있는 파리의 전경을 실내와 실외에서 총체적으로 흡수할 수 있게 해 준 몽파르나스 타워와 개선문. 도심 속의 예술가들이 가득했던 몽마르트 언덕. 난생처음 스윙댄스를 배워보았던 라라랜드 재즈클럽 Caveau de la huchette. 고양이가 식사하는 내내 내 무릎에 앉아있었던 프렌치 레스토랑 Auberge de la Reine Blanche.

Ce que m'a manqué.


그중에서도 센 강. 에펠탑에 대한 애정은 다음번에 자세히 풀어보기로 하고 우선은 센 강부터. 이번에 다시 파리를 찾고서는 정말이지 매일같이 찾아갔다. 마치 오랜 기간 이별했던 연인이 다시 재회하게 되었을 때 그간의 그리움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하루도 빠짐없이 발도장을 찍는 것처럼, 나 역시 열렬히 센 강을 찾고 또 거닐었다. 다만 이전에는 강과 나 우리 둘밖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면, 이번엔 강과 나 그리고 강변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누워서 강바람을 쐬고, 누군가는 와인을 마시고, 누군가는 배를 타고, 또 누군가는 춤을 추고. 내가 애정 하는 이 강을 향해 각자의 추억을 덧입히는 모든 이들에게 나는 묘한 연대감을 가졌다. 상대를 독점하고 싶어 서로의 얼굴만 붙잡고 있는 유아기적 방식이 아닌 좋은 것을 내게도 네게도 나누고 싶어 지는 관계의 확장. 어쩌면 이제야 나도 센 강 아니 파리와 진정으로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된 건 아닐까?


고양이가 있던 레스토랑에선 고양이가 사라졌고 대신 음식 맛이 더 좋아졌다. 혼자 찾아간 재즈클럽에선 이전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 할아버지(왠지 지난번과 같은 분 같기도 하다)께서 날 이끌어내 춤을 가르쳐주셨고, 내 실력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첫 파리 여행에서 가장 먼저 갔던 곳인 노트르담은 화재 후 이전의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기원을 온 힘으로 받아내며 제 모습을 되찾기 위해 일어서려 애쓰고 있는 굳건한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본격적인 생활이 시작되기 전, 여행객 모드로 파리를 엿보았다. 많은 것들은 바뀌기도 했고 그대로이기도 했다. 나는 이들에게 어떨까. 일 년 만에 나를 바라본 에펠탑과 센 강은 무엇이 그대로이고 무엇이 달라졌다고 느끼고 있을까.


내일부터 또다시 새로운 것들이 덧입혀지겠지. 어떤 형태일지 알 수 없으니 겪어나가는 수밖에!

Je suis très ravie de te revoir. Mon cher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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