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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네마 Jun 09. 2019

프랑스 파리 생활기 #3 대답을 내놓아라, 에펠탑!



2019년 6월 3일 월요일. 본격적인 파리 생활의 시작. 오전 10시부터 2시까지 아르바이트, 오후 2시 반부터 5시 반까지 학원 수업. 학교나 직장을 다니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저 평범한(혹은 널럴한) 일정이겠지만, 회사를 그만둔 지 꽤 오랜 기간이 지나 한동안 누군가 "내일은 뭐해?"라고 물어봐도 "몰라! 내일 돼봐야 알지!"라고 대답하는 것이 익숙했던 나로서는 이렇게 시간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고정적인 일정이 생기는 것 자체가 꽤나 생경한 기분을 자아내는 일이었다. 나 잘할 수 있을까.


아르바이트는 화요일부터 시작하기로 했으니 우선은 학원부터. 혹시라도 첫날부터 지각쟁이가 될까 봐 조금 서둘러 준비를 했더니 수업 시작까지 아직 삼십 분 남짓 남아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Un cappucino, à emporter, s'il vous plaît"

(카푸치노 한 잔, 테이크아웃으로 부탁해요.)



프랑스에 온 뒤 불어로 주문할 때마다 영어로 되묻는 이들이 많아 조금은 의기소침해지고 있었는데, 웨이브 진 갈색머리, 그리고 그보다 더 짙은 밤색 눈을 지닌 이 곳의 점원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À emporter? D'accord. Merci beaucoup."(테이크아웃이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여기 왠지... 맘에 드는데?


커피를 받아 교실에 들어가니 한 명의 아랍계 여학생이 앉아있었다. Bonjour라고 어색하게 인사한 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착석. 시간이 지나면서 일곱 여덟 명의 학생들이 나머지 자리를 채웠을 때쯤 다른 이들이 "나딸리"라고 부르는 선생님이 들어왔다. 중단발에 온화한 미소를 지닌 그녀. 프랑스 배우 누군가 닮은 것 같은데 누구였지.. 라면서 딴생각을 하던 중 눈이 마주쳐버렸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이후 세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제일 처음 인사했던 쿠웨이트에서 온 그 여학생과 나. 그 날의 뉴 멤버였던 우리 둘은 서로를 비교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실력 차이가 현저했다. 원어민에 가까운 실력을 지닌 그녀와 간단한 질문도 알아듣지 못해 "Pardon? Excusez-moi?"를 여러 번 되풀이했던 나. 쥐구멍이 어디 있었으면 머리라도 낑겨넣고 숨어봤을 텐데 흑흑. 하루 만에 바보임이 탄로 나 버렸다. 젠장.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비슷한 상황의 연속. 오전에 아르바이트까지 하고 오니 더 피곤하고 넋이 나가 선생님의 작은 농담 하나에도 적당히 눈웃음으로만 커버하면서 수없이 많은 말들을 귓구멍으로 흘려만 보냈다. 그나마 문법 관련 설명을 해주실 때는 문법 강국 대한민국에서 온 덕에 얼추 따라갈 순 있었지만, "Qu'est-ce que tu penses, Bo?(어떻게 생각하니, 보?)", "Tu veux, Bo?(네가 할래, 보?)"라고 내 의견을 물을 때면 곧바로 머리가 새하얘져 매번 굴욕적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집에 가는 길 눈에 들어온 에펠탑. 그리도 매력적이었던 이 회색 철탑이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수업을 꾸역꾸역 마쳐낸 그 순간엔 원망스럽게만 보였다.


"나를 대체 왜 이곳으로 이끈 거야? 대답을 좀 내놔봐!"


그렇게 어학수업 첫 주의 절반을 흘려보낸 수요일 밤, 마침 비도 대차게 내리길래 슈퍼에서 치즈와 햄이 들어간 갈레뜨 하나를 사 와 일찍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조명을 켜지 않은 깜깜한 방 안에 혼자 앉아있었다. 그런데 내내 억눌러온 생각들이 하나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나는 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 분명 많은 것들을 저버리고 떠나온 길인데, 뭔가를 배워가기는 커녕 바보짓만 하다 돌아가면 어떡하지. 덜컥 겁이나 버렸다.


그대로 가만히 앉아있으면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 민낯에 잠옷 차림인 초췌한 상태로 코스모폴리탄 잡지 하나를 챙겨 파란색 대문 밖을 나섰다. 집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브라서리가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왁자지껄. 뭔가 이 시간의 여느 레스토랑과는 상이한 분위기였다. 뭐지? 싶긴 했지만 내가 어찌 이 나라와 이 문화를 다 알 수 있을까 싶어 신경을 끄고 그냥 구석자리로 들어가 보르도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와인을 홀짝이며 잘 읽히지도 않는 잡지를 뒤적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가게 안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다들 흥겹고 친밀해 보이네. 부러워라. 더 울적해졌다.


오늘의 기록이나 남겨야지. 카메라를 들고 잡지와 와인을 찰칵찰칵 찍고 있는데 갑자기 그때 멋지게 빼입은 한 여자가 활짝 웃으면서 내게 다가오더니 "사진 찍어줄까?"라며 말을 붙였다. 당황스러웠지만 끄덕끄덕. 처음 보는 그녀 앞에서 나는 몇 번씩이나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고, 이윽고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미국에서 온 아프리칸아메리칸 애니타. 휘트니 휴스턴을 생각나게 하는 풍성한 머리와 생기 넘치는 표정. 작은 몸짓과 말투 하나하나에도 당당함과 섹시함이 흘러넘쳐 멋있다는 생각이 단번에 들 수밖에 없는 그런 여성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왔다는 내 이야기(이 이유가 전부는 아니지만 불어로 설명하기 이만큼 간단한 게 없어 늘 대는 핑계)를 듣고 내가 프랑스어로 애쓸 때면 같이 프랑스어로, 조금 버벅대다가 마지못해 영어로 대답할 때면 다시 영어로, 완전히 나를 배려하는 방식으로 맞춤형 대화를 이어가주었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니 오늘은 이 브라서리의 마지막 운영일이었고, 그녀는 같은 건물 위층에 사는 단골손님이라고 했다. 내가 바로 옆 건물에 산다고 하니 자주 만나자며 자신의 번호도 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집에 가기 전 뱉은 마지막 한마디.


Enchantée. Bienvenue à Paris!

(반가워, 파리에 온 걸 환영해!)


꽁꽁 얼어붙어있던 마음이 녹아내릴 정도로 따뜻했던 애니타가 돌아간 뒤에도 나는 그곳에 좀 더 앉아있었다. 그러다 다른 이들과도 한두 마디식 주고받게 되었는데, 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 있는 단골손님들 대부분은 바로 옆 맹인학교에 다니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런데, 그 들과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다 느낀 건 내가 그들을 배려하느라 지나치게 신경 쓰던 것 자체가 일종의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얜 그래도 이만큼은 보이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보여"라고 자조적인 장난을 치기도 하고 내게 지팡이를 건네고 짚어보라고 하기도 하고, 장애가 있는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긍정적이고 밝고 유쾌했다. 몸이 건강한 나보다도 훨씬.


집에 돌아와 보니 애니타의 문자가 와있었다. 답장을 하고 문 밖을 나서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벅찬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학원에 갔다. 이전과 다름없이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했고 수업내용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버거울 때면 옆 학생에게 말을 붙여 물어보았다. 개인적인 대화도 나누었다. 한 친구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프랑스에 왔는데, 고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했다. 프랑스에 계속 살며 시나리오도 쓰고 영화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뱉어도 이룰 자신이 없어 늘 "아마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라고 얼버무리곤 했는데, 참 용기 있는 친구다.


집에 가기 전 다시 에펠탑을 보러 갔다. 에펠탑과 이어진 기나긴 길의 끝, 샤요 궁 앞에서는 Diner en blanc이라는 흰 옷 입고 붉은 와인을 마시는 파리의 전통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모두들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그날은 나 역시 즐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금요일, 드디어 한 주의 마지막 수업. Grand palais라는 미술관으로 야외 현장학습을 나가게 되었다. 오르세에서 처음 마주하곤 흠뻑 빠져버렸던 펠릭스 발로통의 그림도 보고, 예쁜 정원도 걷고, 교실 안에선 아직 서먹했던 다른 친구들과도 몇 마디씩 말을 주고받기도 하고.

우리는 그 곳에서 교과서 속 미술작품이나 화가의 정보를 달달 외우는 방식 대신 각자 내키는 대로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어릴 적부터 이렇게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문화생활에 노출되면 사고의 틀이 열릴 수밖에 없겠구나.


그렇게 한 주의 끝을 멋진 갤러리에서 마무리하고 에펠탑의 빛을 가득 받은 샹젤리제 거리를 걷다 들어갔다.


참 다사다난했던 일주일. 무사히(?) 끝났구나.




이봐, 에펠탑! 네가 나를 왜 다시 불렀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너는 앞으로도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도 같아. 그런 네가 밉긴 하지만 어쨌든 반갑다. 우리 잘 다퉈보자. Enchanté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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