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파리 도착
6월 3일 어학원 개강 및 아르바이트 시작
10월 18일 어학원 등록기간 종료
11월 27일 비자 만료
돌아가기로 했다.
10월 초 아르바이트하던 곳이 폐업하면서 실직상태가 되었지만, 운이 좋게 한국에서 잠시 일하던 곳에서 재택근무 일자리를 주셔서 마음에 큰 부담이 되었던 경제적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집 계약과 학원 재등록 및 비자 연장을 코앞에 둔 상태에서 이곳에서의 생활에 일시적인 위기가 발생하면서, 나는 잠시 브레이크를 걸어두었다.
고민을 시작했다.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집 계약은 일단 보류해두고 한국으로 가는 항공권을 살펴보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어학원 상담은 이곳저곳 받으러 다니는 기이하고 모순적인 행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테섬 부근에 있는 센 강 유역을 걷고 있던 중이었다. 5월에 파리에 도착해 이 강을 찾아왔던 내가 떠올랐다. 한국에 있을 당시 아무거나 할 수는 없단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하루하루 시간만 흘려보내면서 답답해했던 내가, 열한 시간의 비행을 지나 이 곳에 당도해서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고 있던 그 순간. 나는 다시 뭐라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하루 네 시간씩 아르바이트 업무를 하기. 일이 끝난 뒤에는 세 시간짜리 학원 수업을 들으며 배운 내용들은 집에서 복습하기.
마음이 어려운 날엔 에펠탑이나 센 강을 보러 가 스스로를 북돋우고, <Diner en Blanc>, <La fete de la musique>, <La nuit blanche> 같은 축제가 있을 때는 놓치지 않고 참여해 프랑스인들의 열정에 함께 동화되기도 하고, 대대적인 불꽃축제가 열렸던 프랑스혁명기념일 날에는 에펠탑에서 팡 팡 터져 나오는 보라색 불꽃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하고.
그러다 주말에 짧은 여유가 생겼을 땐 프랑스 소도시들도 한 번씩 방문해 둘러보고, 긴 휴가가 생겼을 땐 옆 나라 영국에도 다녀와 온갖 잔망스러운 짓들을 하며 한껏 즐기기도 하고.
산뜻한 봄, 43도에 육박하던 들끓는 여름, 쓸쓸함이 깊은 가을. 세 계절을 그렇게 나는 무사히 거쳐왔다.
뭐라도 하고 있었다. 뭐라도 하는 것치곤 꽤나 잘 해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젠 '뭐라도'를 할 줄 알게 되었으니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 졌다. 마음과 정성을 들여 하나씩 채워나가는 나만의 '무언가'를 제대로 쌓아보고 싶어 졌다.
결국 이제 내가 해내야 할 것은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이 아닌 조금 더 험하고 먼 산을 등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신발도 한번 갈아 신고 장비도 한번 수선하고, 위기상황에서 힘이 되어줄 연료와 식량들도 채워 넣고, 무엇보다 어떤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을 굳건한 마음을 준비해 다시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11월 14일. 프랑스어 자격시험 DELF B2를 치고 왔다. 내년 3월은 되어야 쳐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시험인데, 이곳에 있던 동안 나도 모르는 새 실력이 부쩍 늘었음을 체감하게 되어 한번쯤 자신을 테스트해보고 싶은 마음에 시험을 접수하였다.
사실 언어는 현지인들과 자주 어울리는 게 제일이라던데 나는 일과 학원생활만 반복했음을 자백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3시간 동안 프랑스인 선생님과 대화를 주고받고, 집에서 밤마다 복습을 거듭하며, 생활중에도 조금씩이나마 연습을 해오면서, 나도 모르는 새 실력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나 보다. 합격여부는 두 달이 지나야 알 수 있겠지만 체감상으로만 놓고 보자면 도전해볼 만한 시험이었다.
한국에 돌아간 뒤에는 내년 3월 초에는 한 단계 윗 단계인 C1시험을 응시할 생각이다. 이번에 친 B2, 혹은 내년에 칠 C1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시, 프랑스 파리의 대학원에 지원해보려고 한다.
한국에 가기로 마음먹은 뒤부터는, 남은 시간 동안 파리의 곳곳을 조금이라도 더 담아두기 위해 더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다. 오랑주리 역시 한 번쯤은 꼭 다시 와서 수련 그림을 보고 싶었는데, 생활에 치여 미뤄두기만 하다가 드디어 찾아오게 되었다. 26세 미만으로 알고 무료입장시켜주신 것은 비밀 :'D (럭키!)
현재 공사 중이라 모네의 수련과 소수의 신인상주의 화가들 작품밖에 볼 수 없었지만, 마구 돌아다니던 중 멀찍이 흐릿하게 보인 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Henri Edmond Cross의 작품. 몽환적이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이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갔던 영국 브랜드 프랜차이즈 카페 <Pret a manger>의 카푸치노도 한국 돌아가면 한동안 계속 생각날까 봐 매일같이 마시고 있다.
Les parisiens. 가을이 깊어지니 감각이 더 빛을 발하는 파리지앵들.
각기 다른 모습으로 파리를 담고 있는 길거리 화가들의 그림.
흐린 날 더 아름다웠던 파리의 하늘. 그리고 센 강.
냄새도 지독하고 와이파이는커녕 인터넷도 툭하면 끊기기 일수였지만, 핸드폰 대신 책을 읽고, 에어팟 대신 헤드폰을 낀 아날로그스러운 파리지앵들을 맘껏 관찰할 수 있게 해 줬던 '애증의 메트로'
개선문. 첫 파리 여행 당시 저 위에 올라가 시내 전경을 바라보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와 주인공을 20세기 초로 시간여행시켜주었던 장소 팡테옹 앞 계단.
돌아갈 날을 며칠 앞두고서도 재정적 여유가 넉넉지 않아 쇼핑다운 쇼핑은 하지 못하지만, 그 대신 어여쁘고 유니크한 엽서와 우표들을 몇 장 챙겨보았다.
Gare de Lyon역에 있는 시계탑. 똑딱똑딱. 내가 이곳에 있던 동안 몇 바퀴를 돌고 있었을까.
그렇지만 역시나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에펠탑. 내 마음에 불을 질러줘서 고마워.
에펠탑도 파리도. 꼭 다시 보자. Au revoir, 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