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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네마 Nov 07. 2019

프랑스 파리 생활기 #9 런던과의 외도

2019년 9월 30일 작성한 글


9월 30일 월요일. 오후 한 시.


소르본느 대학 앞의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 사이에 자리를 비집고 앉아 헤이즐넛 카푸치노에 아몬드 크로와상을 곁들이고 있다. Croissant aux amandes. 고소한 버터향, 한 입 깨물면 사르르 부서지는 바삭한 겉껍질, 과하지 않은 단맛의 아몬드 크림, 헤이즐넛 시럽을 두 펌프 넣은 부드러운 카푸치노 한 모금. 기분 좋은 맛.


사실 나는 원래 크로와상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시지빵, 피자빵처럼 이것저것 덕지덕지 붙어있는 녀석들보다 담백한 유럽식 빵들을 선호하긴 했지만, 깜빠뉴나 바게트라면 몰라도 크로와상은 아니었다. 내 불확실한 기억에 의하자면 한국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내 돈 주고 크로와상을 사 먹어 본 적이 없다. 티비나 사진을 보며 '우와 저 크로와상 진짜 맛있겠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꽤나 규칙적으로 Croissant, Croissant aux amandes, 또는 Croissant au chocolat를 먹고 있다.




'파리에 왔으니 크로와상 한 번은 먹어봐야지'라는 생각에 시작했던 의미부여 행동은 어느덧 몸에 익어 습관이 되어버렸고, 이렇게 다양한 것들이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에 스며들어 기존의 나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덧입히고 있다.


타고나게 주어지는 줄로만 알았던 취향도 의도적 행동에 따라 만들어낼 수 있는 거라니. 아니면 원래부터 내 안에는 크로와상을 좋아할 수도 있는 DNA가 0.0001%쯤 숨겨져 있다가 계기를 만나면서 터져 나오게 된 걸까? 내가 확장시킬 수 있는 나, 내 안에 숨겨진 나는 어디까지일까.


아무튼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일하던 중 주어진 간만의 농땡이 타임, 그리고 아몬드 페이스트, 이 두 가지는 확실히 달콤하다.




9월의 마지막 날이다. 한 달 전, 8월의 마지막 날 글을 남기면서 6주 만에 돌아온 것에 대한 반성을 늘어놓았는데 어쩌다 보니 또다시 월말이 되어버렸다. 정신없이 보내던 한 달 사이 일몰은 저녁 8시 반에서 7시 반으로 한 시간 더 짧아졌다. 이제 한낮에도 느껴지는 공기가 쌀쌀하다. 여름 내내 기다려왔던 스산함이다. 차가운 공기뿐만 아니라 추적추적 내리는 비, 잿빛 하늘, 낮보다 기나긴 밤. 내가 정신없던 와중에도 지구와 달은 열심히들 빙글빙글 돌면서 내 인생 스물아홉 번째 가을을 가져다주었다.


지지난주, 일주일 정도의 휴가를 얻어 영국에 다녀왔다.



런던아이와 빅벤으로 상징되는 곳. 그런데 사실 도착하자마자 느낀 것은 내가 이미 너무 파리에 심취한 것인지는 몰라도 런던의 런던아이는 파리의 에펠탑보다 확실히 무언가 약하다. 에펠탑 하나만으로도 끙끙 앓다가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던 화력에 비해, 런던아이만으로 이 도시에 대해 상사병 걸리게끔 만들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을 듯싶다. 마음을 부풀게 만들려면 아무래도 다른 몇 곳을 더 다녀봐야겠다. 이 도시의 진정한 매력은 다른 곳에 숨어있을 거야.


생각해보니 2018년 1월. 늦은 나이에 첫 유럽여행을 결심하고 나서(불과 출국 이틀 전에 결정한 일이었지만) 제일 처음 염두에 두었던 도시가 다름 아닌 파리 그리고 런던이었다. 지금 다시 짚어보니 두 곳 모두 어쩌면 같은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유'와 '사랑'을 숭상하는 프랑스 파리. '노팅힐'과 '로맨틱 홀리데이', 그리고 '휴 그랜트'와 '제임스 맥어보이'를 가진 영국 런던. 두 도시 모두 내겐 다른 의미로 로맨틱한 도시였다.


한 가지 더. 브리티쉬 락(British Rock). 음악의 장르를 구분 짓는 법을 모르던 시절부터 나는 영국 락그룹의 노래들에 환장(?)해왔다. 듣기 좋게끔 정제시켜서 잘 팔리게 포장한 뒤 내어놓는듯한 미국의 팝과는 달리 영국의 팝(Pop) 혹은 락(Rock)에서는 항상 날것의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오아시스, 라디오헤드, 콜드플레이는 물론이고 폴 웰러, 블루톤스, 켄트, 스타세일러 등 등. 뼛속까지 파고드는 우울을 미친 듯이 내질러주는 영국의 락음악에 의해 나는 오랫동안 위안을 받아왔다.


영화와 음악. 나를 지탱하는 이 두 가지의 뿌리가 심어져 있는 곳. 언젠가는 분명 와봐야만 했다.





(피시 앤 칩스와 애프터눈 티는 덤으로 하고)




또 한 가지. 살면서 미친 듯이 빠져보게 있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인 해리포터.


책으로는 4편 불의 잔, 영화로는 2편 비밀의 방까지 출시된 뒤였기에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이미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던 2002년 겨울. 영화를 보러 간다던 반 친구들 사이에 껴서 쫄래쫄래 따라갔다가, 여태껏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던 마법과 마법사, 부엉이와 퀴디치, 알로호모라와 루모스. 새로운 세계가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것을 보고 나는 그날 밤 두근거리는 마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그해 연말,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당시 부모님께 뭔가 쉽사리 조르지 못하던 성격의 맏딸이었지만, 처음으로 갖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지정해 요구해보았다. 해리포터 시리즈 전권 세트. 그다지 기대하지 않던 중 부모님께선 딸내미의 심상치 않은 욕구를 느끼셨는지 정말로 그 선물을 구해주셨다. 비좁은 책꽂이에 꽂혀있던 10권의 해리포터.  중학교 입학 전 마지막 초등학교 겨울방학기간 동안 나는 그것을 종이가 닳고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15년 전 부엉이를 기다리던 꼬맹이는 쑥쑥 자라 런던 해리포터 스튜디오에 찾아오게 되었다.




9와 4분의 3번 정거장을 뚫고 무사히 열차에 안착해 호그와트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말포이 자식이 알짱거리길래 흠씬 혼내주려다 엑스펠리아르무스 정도로 봐주었지.




"슬리데린은 안돼" "Not slytherin"을 중얼중얼거렸지만 결국..!




슬리데린이 되어버렸다.


차분한 척하던 29살의 나는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무런 때가 타지 않았던 시절.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만 가지고 좋아했던 것을 즐긴 뒤 돌아왔다.


생각이 많은 요즈음. 어쩌면 그 마음이 다시 필요한 건 아닐까.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끝까지 파고들 수 있다면, 다른 부수적인 것들은 나를 무너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해리포터로 시작해서 해리포터로 끝내고 싶었지만, 그래도 한참 뒤 돌이켜봤을때도 회상할만한 무언가를 남기고 싶긴 하니까 조각을 덧붙여보자.


내셔널 갤러리에도 다녀왔다. 본래 가고자 했던 곳은 훨씬 아담한 크기에 인상파 회화 컬렉션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코톨드 갤러리였지만 보수공사 중이라 아쉬운 대로 이 곳을 향했다. 겨울이 아직 몇 개월 남긴 했지만, 설경에 자꾸만 눈이 갔다. 너무 유명한 화가에는 마음을 주지 않고 싶어 하는 일말의 자존심이 있기도 했는데, 모네와 시슬레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마음을 마구 끌어당긴다.




영화 노팅힐의 첫 장면, 하늘색 셔츠를 입은 섹시한 휴 그랜트가 거니는 '포토벨로 마켓'에 가기로 한 날에는 영화 속 줄리아 로버츠처럼 가죽재킷을 입고 길을 나섰다. 원래 크롭탑을 입고자 했으나 여행 직전에 식사를 너무 잘한 탓에 살갗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미관상 좋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마지막 날 저녁. 세느 강보다 탁한 템즈강 강변을 걷다가 구매해본 주전부리. 설탕을 덧입힌 프랄리네 땅콩. 단맛과 견과류를 좋아하는 내 손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디저트였다.




같은 유럽 국가이자 매우 가까이 붙어있는 파리보다 오히려 훨씬 멀리 떨어진 서울과 비슷한 색감을 지니고 있던 회색빛 도시 런던. 파리가 수백 년 전 중세시대라면, 런던은 몇십 년 전쯤 막 산업화가 되려던 그 시기에 잠시 머물러있는 듯싶었다. 전통과 현대가 고루 섞여있는 곳.


수개월 전 파리에 온 뒤, 그토록 꿈꾸던 도시였지만 삶을 꾸려나가는 게 버거워지고 나서부터는 마음의 여유를 갖기 쉽지 않았었는데, 한 시간의 시차를 지닌, 유로스타 타고 세 시간 남짓 달려온 이 도시에서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충전하고 왔다.


외도 끝- 돌아가자!




마지막 날 본 노을. 주황빛 경계선이 기억에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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