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여행을 좋아하게 된 나.
그 시간 그 돈이면 그냥 서울에서 호캉스(호텔+바캉스)나 하지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여건만 되면 무슨 이유를 막론하고 떠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은 역시 쉽게 단정지어선 안돼. 무엇이 계기가 되든 자기도 모르는 새,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태도와 관점이 찾아와 자리잡을 수 있다.
얘기가 샐뻔했지만 아무튼 나는 현재 여행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 중 여행 또는 여행지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나를 설레게 만드는 것들 두가지가 있다.
첫째. 인천공항에서 '옥수수베이컨오므라이스'를 먹는 것
둘째. 비행기를 타는 것(특히 10시간 이상의 장거리비행)
아 여행지와 무관하다고 했지만, 이 두가지가 충족되려면 먼 나라이긴 해야겠구나. 국내여행일경우 인천공항에 갈 일이 없고, 장시간 비행은 더더욱 할 수 없으니.
저 중에서도 두번째 즐거움. '장시간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주변사람들은 대개 진저리를 치면서 "그게 대체 왜좋아?" 하고 묻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냥 좋아"라고 대답했지만 세상 모든 일에 '완전한 그냥'은 없는 거니까. 얼버무리고 넘어갔던 '그냥'에 대해 나 스스로도 궁금해서 생각을 좀 해봤다. 나는 왜 비행기타는 걸 그리 좋아할까?
내가 '장시간 비행기 타기'를 좋아하는 이유
비행기를 오래타면 몸이 전체적으로 뻐근하고, 피부도 쩍쩍갈라진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치만 원래부터 기질적으로는 예민해도 신체적 감각 같은건 많이 둔해서 그런가, 그런 불편함들이 크게 고통스럽지는 않고, 목베개와 수분크림 만으로도 어느정도 해결이 가능한 편이다. 그렇게 장시간 비행의 '고통'에 대해 크게 걱정하는 바가 없다보니, 일단 출국장으로 갈 때부터 가벼운마음으로 출국의 설렘만 가진채 공항으로 향하는 게 가능하다.
공항에 도착하면 수속을 마친 뒤 옥수수 베이컨 오므라이스를 먹는다. 탑승시간이 다가오면 화장을 모두 지우고 가장 편한 옷을 입고 비행기에 탄다. 자리를 찾은 뒤 세면도구와 수분크림, 마스크팩, 읽을 책, 휴대폰과 이어폰을 제외하고 모든 짐을 위로 올린다. 휴대폰을 비행기모드로 돌려놓는다.
비행기 안에선 거의 내내 이어폰을 꽂고있지만, 이륙하는 순간만큼은 그 광경도 소리도 어느것도 놓칠수 없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얼마간 구르는 동안에도 이어폰을 끼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본다. 비행기는 이내 굉음을 내며 바퀴를 땅에서 떼고 하늘로 치솟는다. 구름을 하나씩 뚫고 올라가는 동안 작아지는 도시에 먼저 눈길이 가다가 이내 새파란 하늘을 가득 메우는 새하얀 구름들을 바라보게된다. 아무리 공기가 좋지 않은 날이라 하더라도, 그 구름들 위를 뚫고 올라가면 깨끗한 파란 하늘이 무조건적으로 기다리고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전벨트를 풀지 말라는 경고등이 꺼지면 그제서야 이어폰을 귀에 꽂고 미리 다운받아놓은 노래를 튼다.
대부분 아마 이때부터가 엄청나게 기나길고 지루한 시간이 될텐데, 내 경우 그제서야 본격적으로 '도통 흐르지 않는 시간'을 즐기기 시작한다.
노래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비행기 안에서 무조건 듣는 음악이 두 개 정도 있다. 우선 Kent의 747.
Kent가 말하기로는 747이라는 제목은 다들 쉽게 연상할만한 보잉747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노래가 7분 47초이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과연?'하고 의심하는 나. 어쨌든간에 나는 상공을 가르는 보잉747을 연상하며 이걸 듣는단 말이야. 그리고 아무리 들어도 비행기의 이륙부터 착륙까지를 담은 것 같단 말이지!
이 노래의 알맹이는 보컬보다 연주. 노래의 진가도 보컬이 끝나고 연주가 펼쳐지는 3분 10초부터 본격 발휘된다고 생각한다. 그치만 전체적으로도 흐름을 따라가 보면 꽤나 재미가 있다. 곡의 시작을 잔잔하지만 긴장감 있는 드럼소리가 이끌다 4초쯤 뒤 초음파같이 높은 하나의 전자음이 귀를 찌른다. 그 음은 노래가 진행되는 내내 작지만 강한 존재감을 지닌 채 지속되다가 곡이 끝날때쯤에야 다른 소리 사이로 묻혀 들어간다. 그 동안 보컬도 다른 악기들도 제각기 등장해서 곡을 뒤흔들다 제 역할을 다하면 마찬가지로 조용히 가라앉고, 무슨일이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착륙한다. 마치 비행의 과정 같다.
Kent의 747은 이륙하자마자 그리고 착륙 직전에 듣는 것이 제맛이라면, 다른 하나의 곡 Radiohead의 Karma Police는 비행이 절반쯤 지나갔고 절반쯤 남아있을 때, 저 아래 어딘가에 어떤 대륙도 없이 망망대해만을 두고 있을 때 듣기 시작한다.
Radiohead는 두말할 것 없이 Coldplay, Oasis, Starsailor, Keane과 함께 내가 오래전부터 무척 좋아하던 브리티쉬 락(장르에 약하지만 아무래도 브릿'팝'은 아닌거 같아) 그룹 중의 하나이긴했다. 그치만 내가 즐겨듣던 건 Creep이나 No surprises처럼 뼛속까지 파고드는 우울을 노래하면서도 멜로디 한자락에 어딘가 따뜻한 구석을 남겨둔 노래들이었지, Karma Police처럼 어느 한군데도 위안 삼을 구석 없는 곡은 아니었는데 뜬금없는 계기로 듣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장시간 비행을 하게 되었을 때, 비행기 안에서 들을 노래들을 '비행기모드에서도 들을 수 있게 미리 저장해놔야지' 라고 생각만하고선, '아뿔싸!' 실수로 잊어버린 채 비행기를 타버려 핸드폰으로 노래를 들을 수가 없었다.하는 수 없이 비행기가 보유하고있는 플레이리스트안에 있는 곡이라도 몇 곡 훑어봤는데, 외항사라 그랬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난해한 곡들만 가득해 심란하게 계속 넘기다 친숙한 이 곡을 발견했다. Radiohead! 그렇게 반가울수가.
그렇게 몇시간동안 5곡의 재즈와 Karma Police까지 총 6곡정도만 무한반복해서 들었는데, 그러다보니 나에게 있어 그 곡은 그 자체가 비행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세상 모든 것과 단절된 공간에서 듣던 유일한 세상의 노래.
'단절된 공간'에 대해서 좀 더 말해보자면, 그래 나는 결국 그 느낌때문에 비행기 타는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
비행기모드로 외부와 공간(심지어는 시간까지)을 차단하고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 좋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를 언급하고싶지는 않지만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 이륙한지 한참 지나고 승객들의 취침을 위해 모든 불빛이 소등되어있던 때. 비행기가 가장 높은 고도에서 날아가던 그 때, 갑자기 눈물이 터져나온 적이 있다. 이유도 모르겠는데 갑자기 원인모를 울음이 터졌고 삼십분남짓 멈추지않았다. 담요를 얼굴에 덮어두고 한껏 울다가 담요를 걷어내고 주변을 둘러봤는데, 다행히 주변의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바깥 시간도 한밤중인 것 같아 창 가림막을 살짝 위로 올려보았다. 그 순간 평생 살면서 본 중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새까만 밤 하늘을 하얗게 빛나는 별이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실제로 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토록 크고 반짝이는 별을 본 일이 없었다. 아니 분명 그건 누구에게나 평생 보기 쉽지 않을거라 확신한다. 비행기를 꽤 많이 타봤지만 그런 광경은 단 한번도 본 적 없었다.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듯이 가깝게 느껴졌던 그 별들은 칠흙같은 어둠을 한치의 빈틈도 없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몸을 들썩일정도로 눈물을 쏟아내던 것도 잊은 채, 쏟아져 내릴 듯한 별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고등학교시절 반친구가 했던 말 중에 아직도 진하게 기억되는 것이 있다. 부모님이 항공사 직원이셔서 여행을 정말 많이 다닌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자신의 모든 여행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풍경이 있다고 했다. 그건 바로 아버지와 단둘이 사막여행을 갔을 때, 한밤중 어떤 도시의 불빛도 없이 바로 옆 사람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벌러덩 드러누워 보았던 하늘의 무수한 별들이라고 했다. 당시 얘기를 듣기만 했을 때에도 마음이 두근거렸는데, 가까이서 눈앞에 펼쳐진 그 모습을 본 순간엔 정말이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때마침 바로 옆자리 여자분이 잠에서 깨 잠시 일어나려 하시기에 전혀 모르는 사이인 그 분께도 이걸 좀 보시라고 말을 붙였다. 같이 창문밖을 빼꼼히 내다보았고 함께 감탄하며 번갈아 별을 보았다.
울었던 원인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채 짓눌려온 수많은 응어리들이 그곳에서 한꺼번에 터졌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치만 원인이 무엇이든 비행기 안에서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렇게 마음 편히 울다가 또 그렇게나 아름답게 위안받을 수 있었을까.
이렇게 강한 임팩트를 준 순간들 외에도,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이것저것 평범한 것들을 하며 비행기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상적인 시간도 나는 참 좋다. 어떤 소소한 것들도 그 안에선 몇 배로 증폭된 감정을 선사한다. 다들 그렇듯이 평소에 항상 시간에 쫓기듯 살았고, 무엇을 하든 무엇을 결정하든 늘 제약이 되는건 시간이었기에. 작게는 책 한권을 읽으려고 해도 중간중간 다른 일상들이 밀려들어와 마음 편히 보기가 쉽지 않았다면, 시공간의 자유를 허락해 준 비행기 안에서는 모든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엄청난 해방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그 자유로움도 결국 여행이 좋은 이유와 일맥상통한 것 아닐까. 그러한 '자유'를 작디작은 비행기 안에 '속박'되어있는 동안 느낀다는 게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어떤 세상의 것에도 구애받지 않은 그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들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좋다.
한참 영화를 보고 나서도 '시간이 이만큼~ 이나 남았으니 책도 볼 수 있겠다!'
책을 계속 읽다가도 '아직도 많이 남았으니 글을 좀 써도 되겠다!'
글을 쓰고 나서도 '조금 눈붙이고 일어나서 노래나 좀 들어도 되겠다!'
-> 아 이런 무한반복의 과정 너무 좋다.
위에 언급한 '글을 쓴다'는 것은 뭐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때론 편지나 짤막한 일기가 되기도하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때는 끄적거려놓는 여행기가 되기도 한다.
'편지'의 경우, 사실 비행기 안에서 쓴 편지는 단 한번도 당사자한테 준 적은 없다. 그게 누구든.
비행기 안에서 쓴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엔 그것이 아무리 편지라 할지라도 이상하게 뭔가 쑥스럽다. 그래도 써서 남겨놓으면 내가 다시 읽는 것 만으로도 당시의 감정들이 회상되는게 좋아 떠오르는 사람이 생기면 짧게라도 한두마디 적어두긴 하지만, 당사자에게 주지 않고 가지고있는 편지들은 아마 앞으로도 내 서랍 밖으로 나올 일은 없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여행기'도 비행기에서 쓴 건 뭔가에 좀 취해있는 듯한 글이 되고마는데(실제로 취해있기도 하지만) 난 그게 나쁘지 않다. 여행에 흠뻑 빠져있는 여행 중이나, 여행이 끝나고 생각을 정리한 뒤인 여행 후에 더 많은 것들을 적곤 하지만, 다 적어놓고 나중에 한꺼번에 읽어보면 여행으로 인해 벅찼던 마음이 가장 잘 담겨있는건 늘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적어놓은 것이었다. 그 안에서만 담아낼 수 있는 감정이 있나보다. 그래서 쓰는 내내 마음이 일렁이더라도 어떻게든 적어보곤한다.
비행기에서 듣는 노래-밤하늘의 별-영화-책-글쓰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세상과 단절된 자유로운 느낌
적어도 나에게는 비행기 타는 걸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아아 이걸 쓰다보니 또 비행기가 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