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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올 Jul 20. 2021

거꾸로 서게 된 날

요린이의 첫 시르시아사나(sirsiasana)


거꾸로 서게 된 날.


오랜만에 제주도에서 레이오버를 하는 스케줄이 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비행을 마친 덕에 제주에서의 오후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고 이때다 싶어 요가 원데이 클래스를 신청했다. 날이 따뜻해지면 제주에서 야외 요가를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보다 나이가 들면 근력보다는 유연성이 중요해진다는 이야기를 얼핏 듣고는 작년 가을 요가원에 다시 발을 들여놓은 지 8개월 차에 접어들었던 때였다.


그동안의 요가 전적은

스물한 살, 핫 요가 클래스에 3개월 등록 후 3일 출석.

스물일곱 살, 하와이의 이국적인 풍경에 취해 원데이 클래스 체험.

그 뽕에 취해 스물여덟 살, 다시 하타 요가학원 1개월 등록 후 4일 출석.


이토록 초라한 요가 전적의 가장 큰 이유는 내로라하는 뻣뻣함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요가의 아사나(asana: 요가에서 행하는 동작을 아사나라고 한다)를 잘 못하는 나를 지켜보는 게 재미가 없었다.

유연성은 곧 요가의 아사나의 완성도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요가는 '내가 잘 못하는 것'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완벽하게 하지 못할 거면 좀처럼 시작을 하지 않는 인프피(INFP) 인간인 나는 오래도록 요가를 싫어했다. 내게 유연성이 없어? 그래서 요가를 잘 못해? 내가 잘 못하는 건 재미없어! 나 안 해!

뭐 이러한 이유로.


그래서 다시 요가에 도전하기로 했을 때에는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굳세게 마음을 먹었다.


"햄스트링이 확실히 짧아요. 그런데 햄스트링은 늘어나는데 정말 오래 걸리거든요. 꾸준히 해봅시다."


첫 요가 수업을 마치고 나온 내게 요가원 원장님이 아주 솔직하고도 차분하게 알려주셨다.


저는 수영 경력 15년 차입니다. 거의 매일 아침 30바퀴씩 레인을 돕니다. (중략) 저는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기계나 숫자와 함께 나를 평생 괴롭힐 또 한 가지가 아마 부족한 운동 신경일 겁니다. (중략) 시작은 했지만 얼마 하지도 않고 그만둘까 봐 집사람이 매일 걱정을 했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한 달 강습을 받고 나면 25미터 정도는 거뜬히 가는데 저는 25미터 가는 데 석 달이 걸렸거든요. 그리고 아주 놀랍게도 50미터를 가는데 6개월이 걸렸죠.

하지만 그만두지 않았어요. 그냥 내 몫을 꾸준히 했죠. 언젠가 집사람이 묻더군요. 창피하지 않냐고, 어떻게 견디냐고요. 그때 제가 대답했어요. "잘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땀을 흘리려고 하는 거니까."


요가가 부담스러워지려고 할 때면 나는 박웅현 작가의 책 <여덟 단어>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를 계속 떠올렸다. 물론 언젠가 아주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요가 매트에 다시 올라서면서 했던 다짐은 '꾸준히 하기' 였으니까. 여기서 꾸준함은 일주일에 두 번 요가하기와 같은 계획적인 꾸준함이 아니라 질리지 않고 오래도록 하는 꾸준함이었다. 나중에 할머니가 된 나의 일상에 '요가하는 시간'이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아무튼 이 목표는 8개월 동안 꾸준히 나를 요가 매트 위에 세워 두었다.

그리고는 바로 그날, 제주도의 선셋을 바라보며 나는 "그냥 한 번 도전해보세요. 뒤로 넘어져도 괜찮아요. 풀밭이라 다치지 않아요." 라는 선생님의 말에 용기를 얻어 5초 동안 거꾸로 서있는 기적을 맛보았던 것이다. 이전에는 두어번 매트로부터 한 5cm정도 폴짝 폴짝 발만 뗐다 끝났던 아사나였다.


"어머 했어요 했어! 됐어요 됐다!!! 오 됐다. 내려와요."

"??????? 헐 저 했어요?"

"오늘 능력자들만 왔어요? 다들 왜 이렇게 잘하죠?"

"꺄아아아아아아!!!"


원데이 클래스 선생님의 센스 넘치는 순간 포착과 완벽한 삼각구도 덕에 건진 인증샷은 그렇게 자랑이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강제 전송이 되었다는 후기.

그날로부터 또 욕심에 취해 여기서도 서려다가 두려움에 진 날

산스크리트어로 머리를 뜻하는 단어 sirsi-와 동작을 뜻하는 asana가 만나 시르시아사나라고 부르는 이 물구나무서기 자세는 아사나의 왕이라고 하지만 사실 유연성이 크게 필요한 동작은 아니다. 오히려 어깨와 복부의 근력이 있어야 그 힘으로 단단히 버틸 수 있는 동작. 그래서 아마 그동안의 수련으로 조금씩 길러온 외면과 내면의 에너지가 입을 모아 '잘하고 있어~' 라며 격려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또 다시 스멀스멀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올라오기도 하지만 애써 부풀리지 않고 오랜만에 매트 위에 섰다. 여전히 뻣뻣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좀처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나의 머리와 발끝의 낑낑거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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