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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올 Jan 10. 2022

생의 시간은 나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기에

"후우~하 후우 하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곳을 향했다.  까닭에 하마터면 유지하고 있던 견상 자세에서 어깨의 힘이 무너져 잔뜩 결릴 뻔했다.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매트 .  중년 남성 회원님이 내뱉는 호흡 소리였다.


요가에서 물론 호흡이 아주 중요하다. 모든 자세를 할 때 호흡을 하지 않으면 그저 버티기로 끝날뿐. 어색하고 힘들더라도 호흡을 이어주어야 그 자세에 숨이 들어가고 점점 견고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의 고개를 돌리게 할 만큼 크나큰 호흡소리 또한 듣기도 힘든 것이 요가 시간이다. 그룹 수련이라고 하더라도 이따금씩 거친 호흡이 있어줘야 어울리는 야생터 같은 헬스장보다는 훨씬 고요한 호흡이 오간다.


그날은 하타요가를 행하는 어느 평일의 마지막 수련시간이었다. 수련 시작 전, 검은 머리칼 사이로 세월이 좀 엿보이는 흰 머리칼들이 무색하게 매트 위에서 힘 있게 몸을 푸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고는 생각했다. 요즘은 요가하는 남성이 많이 보이기도 하고 내가 다니는 요가원은 또 유독 남성 수련자들이 많이 다니고 있는 곳이라 그 풍경이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중년의 수련생이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기는 했다.


아무튼 50분의 수련시간 동안 그가 내뱉는 호흡 소리는 꽤나 거칠어서 선생님이 틀어주시는 배경음악을 따라 차분한 시간을 즐기고 있던 내 귓가에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의식을 넘기면 좀체 다시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오질 않는다. 쉽게 말해 한 번 의식하게 된 그 호흡소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것인데 초보자인 내게는 제자리를 떠난 의식을 다시 돌려놓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요가는 정신 수련의 목적도 있기 마련인데 그 의미가 아주 무색하게도 그날은 그렇게 초보자 티를 팍팍 내가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것에 대실패 했다.


그대로 아사나(요가 동작) 수련이 끝나고 매트 위에 누워 사바아사나(송장 자세)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잠시 깊은 이완의 시간으로 들어갈게요."라는 선생님의 가이드에 맞추어 은은했던 전등 스위치도 오프. 이 잠시의 시간이나마 힘을 쫙 풀고 고요함을 느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아. 늘 기대는 이렇게 무너져버리고 만다. 커엉~커어엉 하고 귓가를 때리는 코골이 소리. 그 소리의 정체도 역시나 옆 매트. 순간 마음에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그의 하루가, 아니 이 수련시간만으로도 고단하셨나 보다 싶다가도 찰나의 시간 동안에 주의를 완전히 놓아버리고 잠이 들 수 있는 멘탈이 신기했다. 물론 아주 아주 가끔 정말 이몽룡 저리 가라 하는 몽롱함에 속절없이 무너진 날에는 나도 모르게 커억~하고는 흠칫 놀라 민망하게 일어났던 날이 나에게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절대 잠에 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단 말이다.

같이 수련하는 옆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점점 커지는 코골이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찰나의 순간에 신기함과 불편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러다 문득, 정말 문득

감겨 있던 내 눈앞에 갑자기 영사기가 돌아가며 희미한 불이 켜지는 듯 그의 하루가 나도 모르게 그려졌다. 그것이 실제이든 내 상상에만 존재하든 말이다.


그렇게 내 멋대로 그려진 그의 하루는

고된 본업을 정신없이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쌀쌀해진 날씨의 방해와 피로가 속삭이는 귀찮음을 이겨내고 소중한 저녁시간을 기꺼이 내어 본인을 위한 수련을 하러 이곳에 와 지금 깊은 이완이라고 쓰고 힘을 다 뺀 나머지 잠이 들었다는 것 까지.


그러나 사실상 본인이 이 요가원에 와 있는 목적과 스스로의 속도, 그리고 밀려오는 마음에 맞추어 50분의 수련을 알차게 보낸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였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요가 선생님이 늘 강조하는 -힘을 빼고, 그 누구도 아닌 본인의 속도와 본인의 역량에 맞추어 진정한 수련-하는 자세는 그의 매트 위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곱씹어보니 내가 요가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삶을 더욱 잘 살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은 이 생의 시간이 나를 중심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는 모든 사건들을 나의 '시선'과 '시각'으로 바라보다 보니 흘러가는 시간은 모두 나의 타임라인 속에서만 흐른다고 생각했다. 나의 탄생, 나의 입학과 졸업, 나의 만남과 실연, 나의 성공과 실패. 

그렇게 1인칭 시점에서만 살다가 이 세상을 3인칭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어느 날, 시간은 그저 이 세상에 똑같이 흐르고 있는 것일 뿐, 그 속에 나와 별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나는 불안해졌다. 갑자기 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던 내가 작디작은 존재로 보였을 때의 불안함이란. 그리하여 이 불안함이라는 파도 속에서 비록 작디작은 존재로 그 파도를 넘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름대로 견고하게 삶을 살아나가는 것. 언젠가부터 그것이 삶의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파도를 넘기 위해 챙긴 무기 하나, 그것이 요가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 수련 시간의 주인은 나만이 아니고, 옆 매트에서 본인의 파도를 잘 넘어내고자 땀을 흘리는 그에게도 제 몫이 있다. 내 삶의 시간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그의 시간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에까지 미치니 갑자기 그와 옆 매트에서 수련하게 된 오늘이 행운으로 느껴졌다. 잊고 있던 생의 진실을 다시 상기시켜주었으니 말이다.


그날 이후로는 서로 수련시간이 다른지 마주쳐본 적이 없다. 언젠가 또 한 번 같은 시간에 수련을 한다면 그의 호흡이 정겹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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