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존 탈출
에어랩.
처음엔 에어 재질(?)의 식품 포장 비닐랩이 새로 나온 줄 알았다.
난 머리손질에는 선천적으로 똥손이라 고대기도 쓰지 않는다. 그저 미용실에서 알려 준 동작을, 드라이기로 머리 말리며 동글동글 말며 말릴 뿐이다.
머리 스타일에 있어서 상당히 보수적인 편이라 성인이 되고 나서 머리 스타일에 큰 변화가 없다. 몇 년 만에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도 항상 나의 똑같은 머리에 지겨워하기도 반가워하기도 한다. 내 일러스트 캐릭터의 머리 모양이 딱 나의 시그니처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다녔던 미용실을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결같이 다니고 있다. 이사에 이사를 거듭해 지금은 수도권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한참을 달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다니고 있다. 미용실 언니가 유학 갔을 때, 내가 일본에 유학 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다른 미용실에 가본 적이 없다. 내가 의리파이기보다는, 그만큼 머리 스타일 변화에 있어서 상당히 보수적이다.
에어랩이 유명해지고 홈쇼핑에서 매진 행렬을 달려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 어떤 고대기도 나의 똥손을 만나면 한낱 인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에어랩은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에 찾아왔다. 친구가 에어랩을 샀는데 너무 좋다고 찬양에 찬양을 해댔다.
굴러가는 돌을 줍고도 좋다고 하는 친구라 처음엔 그래그래 하고 말았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이 친구의 머리 스타일이 정돈되고 스타일리시해졌다. 머리숱이 적고 모발이 얇아서 금방 부스스해지는 헤르미온느 스타일이었는데, 점점 연예인 머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거 뭐야? 요물이 따로 없네? 친구에게 빌려서 나도 해보았는데 괜찮았다. 이용방법이 좀 복잡한 것 같지만 유튜브를 보면서 연습하면 금방 익숙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잠깐, 얼마라고? 60만 원??
옵션에 따라 가격차이가 있지만 안사면 안 샀지 사고자 마음먹었으면, 최신형, 최상 옵션을 사야 하는 성격이라 컴플리트 모델로 마음을 굳혔다. 가격이 생각보다 너무 비싸서 마지막까지 고민을 하긴 했지만, 집 근처 마트에서 카드 할인 행사를 시작했다. 이건 완전 사라는 하늘의 계시가 아닐까? 나를 위한 카드 할인이 아닐까?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셀프 선물로 에어랩을 구매했다.
1년에 디지털 파마 3~4회, 뿌리 염색 및 전체 염색 3~4회를 하고 시술받을 때 커트로 머리 손질을 하고 머리 상태에 따라 연 1~2회 트리트먼트를 받는 것이 나의 미용실 주기 루틴이었다. 그런데 에어랩을 사고 나서 펌이 점점 풀어지는 2개월 반 정도부터는 에어랩이 큰 활약을 했다. 자연스럽게 펌을 하는 주기가 길어지고 시술을 적게 하다 보니 머릿결도 좋아졌다. 펌, 트리트먼트 아낀 값으로 이미 에어랩 뽕은 뽑을 만큼 뽑은 것 같다. 에어랩은 스타일링에도 좋지만, 기본 드라이기 기능도 나쁘지 않았다. 이제 펌이 풀어지는 거지 존의 시기가 와도 별로 무섭지 않다.
머릿결도 살리고, 펌 비용도 절약해주는 에어랩, 안 샀으면 어쩔 뻔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