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서 거울치료
글을 시작하기 전, 제목의 '딸'은 모든 딸들을 일반화하여 통칭하는 것은 아님을 말씀드려요.
15살 딸과 2주간의 방콕 여행을 마치고 오늘 아침에 돌아왔다.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서고부터는 여행에 좋은 기억보다는 아픈 기억들이 콕콕 남아 딸과의 여행이 점점 뜸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이가 예전에 갔던 그곳에 또 가고 싶다고 한다. 그곳은 7년 전, 8살 아이와의 첫 둘만의 해외여행지였던 방콕이다.
다시는 여행 안 가!라는 다짐을 수 없이 했던 것 같지만, 딸이 가고 싶다는데 그런 기억들은 가볍게 무시하고 바로 일정을 잡았다. 황금연휴가 끝난 다음 주라 저렴하게 비행기표를 구매할 수 있었다. 아이가 원했던 것은 방콕으로의 긴 여행이었기에 장장 14일간의 긴 여정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 여행 중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을 남기고 싶다.
잔소리 대장군
어릴 때 아이에게 내가 붙여준 별명은 떼장군이었다. 떼를 한 번 부리기 시작하면 어찌나 강력한지 떼장군이 물러가고 나면 온몸의 기가 빠지는 느낌이었다. 크면 좋아지겠지... 기대하며 버텼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떼장군은 사춘기를 거치며 잔소리 대장군으로 진화하고 말았다. 잔소리 대상은 엄마, 바로 나의 모든 행동과 말이다. 별 의미 없이 툭 던지는 말에도 아이는 의미를 담고 톡 쏘며 잔소리를 한다. 이번 여행에서 딸의 잔소리는 정점을 찍었고, 나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말았다.
잔소리 예시 1)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저기 할아버지 지나갈 때 우리도 건너자."
"엄마는 왜 사람을 다 늙게 봐?"
"아니.. 그냥 멀리서 보니 머리가 하얗길래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지."
"엄마도 누가 늙게 보면 기분 좋아? 엄마는 왜 항상.. 중략.."
잔소리 예시 2) 해리포터 주인공의 현재 사진을 보고..
"엄마, 해리가 50살쯤 되었지?"
"아니, 엄마보다 젊을걸?"
"아닐 텐데.. (찾아보더니) 와 30대야. 엄마보다 젊네!"
"서양인들은 대체로 좀 빨리 늙어 보이더라"
"안 늙는 사람도 많거든! 엄마는 왜 항상.. 중략.."
잔소리 예시 3)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닫기 버튼을 누르자..
"엄마, 제발 닫기 버튼 좀 누르지 마. 엄마는 왜... 중략..."
(층마다 엘리베이터가 서니 엘리베이터 안은 꽉 찼고 내가 마침 버튼 앞에 있었기에 닫기 버튼을 눌러야 할 것 같은 부담이 느껴졌다고 변명하고 싶다. )
막상 써놓으니 너무 하찮아 보이지만, 실상은 아이가 기분이 좋을 때를 빼놓고는 하루 종일 모든 행동과 말에 통제받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아이의 사생활도 보호해야 하므로 구체적인 내용을 쓸 수는 없지만(아주 사소한 것만 나열) 그 수위가 높을 때면 억울함과 나도 함께 공격하고 싶지만 어른임으로 참아야 하는 답답함에 눈물이 왈칵 날 정도였다. 엄마에게 비수를 던진 아이는 슬슬 내 눈치를 보고 나는 못 본 체 창문 밖을 응시하며 흐르는 눈물을 몰래 닦아내야만 했다.
엄마도 그러셨겠지
아이에게 하루 종일 구박과 타박을 받다 보면 그로 인해 내 마음이 속상한 것보다 더 힘든 게 있다. 바로 엄마에게 똑같이 잔소리하던 내 모습이다.
"엄마, 식탁에 과도 올려놓지 마. 더 글로리에서 장동은 엄마가 과도 들고 사과 잘라먹는 거 난 좀 그렇더라."
"엄마, 반찬 덜어서 먹자. 못 사는 집 첫 번째 특징이 반찬통 열어 그냥 먹는 거래."
"엄마, 엄마는 그 사람들 싫다면서 왜 자꾸 연락해? 좋으면 그냥 좋다고 해"
"엄마, 미안한데 지금 내가 다른 생각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엄마가 하는 얘기가 안 들려."
엄마를 생각한답시고 했던 말이라고 변명할 수도 없이 명백히 엄마를 통제하려던 민낯이 드러난다. 아이를 통해 내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엄마께 한 없이 죄송해졌다.
엄마는 과도를 식탁에 올려놓는 게 편할 수도 있고, 반찬통을 바로 사용하는 게 더 익숙하실 수 있는데 그냥 내가 싫다는 생각에 엄마를 나무랐다. 나와 대화하고 싶어 TV에서 본 이야기들을 풀어놓으셨을 수도 있는데 난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엄마의 말문을 막고야 말았다.
아이와 힘들수록 더더 엄마 생각이 났다. 서울에 가면 엄마께 정말 잘해야지. 아니, 엄마 그대로를 존중해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뭐가 그리 잘났을까
주위에도 보면, 나를 포함한 많은 딸들이 유독 엄마에게 톡 쏘며 더 맵게 말하곤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기도 하다. 물론 나도 엄마에게 받은 어릴 적 상처가 있다.
그러나 자식을 키우고 많은 힘든 상황들을 겪어 보니 그 이면에는 자식은 알 수 없는 부모의 고뇌와 아픔, 고생이 있다. 이렇게 힘들게 자식들을 키워내고도 예쁜 말 한마디 못 듣는데 자식들은 어릴 적 단편적인 기억들을 토대로 부모를 평가하고 통제한다.
억울하실 거다. 그럼에도 "그래 내가 몰랐네~"하며 내 손을 들어주는 우리 엄마를 비롯한 엄마들... (물론 아닌 집도 많을 거지만)
정말 엄마를 생각해서 한 잔소리였는지, 세련되지 않은 엄마가 부끄러웠던 것은 아닌지, 엄마를 나무라면서 내가 우위에 서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본다.
2주 간의 딸과의 둘만의 여행, 아름다운 뒷모습이 떠오를 만한 주제지만 실상은 너덜너덜해진 상처가 대부분이었다. 도망갈 곳 없는 여행지에서의 갈등은 정말 막막하지만, 다행인 점은 도망갈 곳이 없기에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그 실마리를 토대로 딸과의 관계는 앞으로 나의 인내와 딸의 성장 등으로 점점 나아질 것이라 희망을 가져본다.
그 밖에 엄마에 대한 나의 행동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 점이 이번 여행에 가장 큰 수확이다. 아이의 행동에는 외할머니를 대하는 내 모습이 투영되었을 것이다.
엄마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나는 엄마를 평가하고 나무랄 자격이 없다. 딸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모녀 삼대 관계를 위해 내가 먼저 변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