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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장갑 》2화. 모닥불, 커피, 그리고.

미지근한 커피 한 잔이,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었다.

by 밍당

✦ 이 이야기가 처음이라면,

아래에서부터 함께 걸어가 주세요 → [1화 보기]



피아노, 수천 개의 눈동자. 그리고 어떤 한 남자.

얼어붙은 손가락에 건네진 따뜻한 벙어리장갑.

치유와 회복의 겨울 단편.

감성과 일러스트로 그려낸 따뜻한 이야기.



“거 참.”


남자는 머쓱한 목소리로

할 말을 찾는 듯 잠깐 시간을 둔다.


악의가 없었다는 건 알았나 보다.

정말 무심코 한 행동이었으니까.


살짝 고개를 들어 남자를 살펴보니

화났다기보단

어이가 없는 듯 날 관찰하고 있었다.


건장한 낯선 남자가

날 유심히 관찰하고 있단 생각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생각해 보니 나, 꽤 위험한 상황 아니야?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도 놔두고 왔는데.


하지만 내심 기대도 되는 게,

과연 이 남자에게 어떤 말이 이어질지

호기심 가득해지기도 했다.


나의 나쁜 버릇이 발동했나 보다.

사람에게 기대하는 버릇 말이야.


이상하게도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추워요?”


응.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말이 나왔다.


내 기대를 채워주지도 저버리지도 않는

무뚝뚝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말투.


예상 밖의 물음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아니, 다 큰 어른이 이 날씨에 그렇게 입고 돌아다녀요?”


남자의 걱정스러운 핀잔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내 나름대로의 방한구를 갖추고 나왔다

생각했건만

남자의 눈에는

턱없이 기준미달인 모양이었다.


적절한 대꾸가 생각나지 않아

잉어가 입을 뻐끔거리듯

말을 멈추고 말았다.


“불 좀 쬐다 가요. 그러다 얼어 죽겠네.”


불이라는 따뜻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이제껏 참아왔던 한기가

순식간에 밀려들어왔다.


아,

진짜 이러다 죽겠는데.


다리가 순식간에 풀려버려서

그대로 쓰러질 것 같다.

더구나 주변은 허허벌판이라

잡을 곳도 마땅치 않다.



그대로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뒤로 넘어지려는 찰나,

손에 뭔가 잡혔기에

아득바득 붙잡고 버티고 섰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니

커다랗고 뜨거운 것이

내 손을 감싸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남자의 손이었다.


“진짜 쓰러지겠네. 이리 와요. 바로 옆이니까.”


여기서 소릴 지르면

너무 염치없는 행동이겠지.

손을 잡은 건 나니까 말야.


그래도 과년한 처자가

모르는 남자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건 좀 부끄럽다.


발걸음을 멈추고 잠깐 저항을 해봤지만

내가 비루한 건지

남자가 완력가인 건지

그대로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뭐,

사실은.


남자의 손길이

너무 부드럽고 따뜻해서,

깜짝 놀라

아무 반항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하겠지.



질려버렸다.


불을 쬐라더니

정말 모닥불을 쬐게 하고 있다.


잘 쪼개진 마른 장작이

타닥타닥 타고 있는 풍취 있는 광경도 아니었다.


뭔지 모를 나무둥치와 가지들을

대충 얹어 불태우고 있는,

어떻게 보면 농사를 끝내고 마무리하는데

일하러 끌려온 느낌이었다.



“으…….”


게다가 훈기를 가둘 공간도 아닌 탁 트인 곳이라

불을 쬐는 얼굴은 뜨겁고

반대의 등과 엉덩이는 무척 시렸다.


그렇다고

앞뒤로 노릇노릇 뒤집어 굽듯 돌려가며 불을 쬐기엔

너무 민망하지 않은가.


하는 수 없이 손바닥을 비비며

언 손이라도 녹일 수밖에 없었다.


“이 날씨에 그렇게 입고 다니면

엄마가 뭐라 안 그래요?”


이 남자는 깐깐한 생활지도선생님처럼

아직도 내 복장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엄마랑 같이 안 사는데요.


계속 날

손이 많이 가는

번거로운 아이정도로 취급하는 말투에

슬슬 부아가 치밀러 올랐지만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래.

눈먼 돌멩이에 맞은 남자의 마음도 헤아려야지.

내가 죄인이니까.



남자는 길쭉한 가지를 불쏘시개로 쓰며

장작불을 뒤적거렸다.


남자의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타닥거리며 수 백 갈래의 불똥이

하늘을 향해 춤을 추다

고작 수 초 내로 하얀 재가 되어

온 세상에 떨어진다.


어딘가 몽환적이고

일상적이지 않은 그 광경에 눈을 뺏겨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커피 마셔요?”


남자의 말에 희미해져 가던 현실감각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따뜻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르니

잊고 있었던 한기가

다시 온몸을 돌기 시작한다.


그래서 한 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여

타인의 호의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자는

내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흠칫 놀라곤

보온병 뚜껑을 열고는

분명히 한 번 이상 사용했을 법한

주름이 져있는 종이컵에

커피를 꼴꼴 붓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그리고 퍼지는

인스턴트커피의 향기.


“자.”


남자는 아슬아슬하게 넘칠 듯 말 듯

종이컵에 꼴꼴 따른 커피를 내게 주었다.


이게 시골 인심인가?

잡을 곳도 마뜩잖아 조심히 종이컵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잡는다.


손에 화상이라도 입으면 큰일이니까.


이런 생각부터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바보 같이 말야.

아직도 손 타령을 하고선.


그리고 남자가 건네준 커피는

그리 뜨겁지만은 않았다.


“좀 식었어도 마실 만해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

커피를 홀짝거렸다.


뜨뜻미지근한 커피.

보온병 안에 들어있었건만 미지근해진걸 보니

꽤 오래 밖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


아직 열한 시도 되지 않았건만

이 남자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남자의 부지런함에

자연스럽게 감탄을 하고 말았다.


남자는 가끔 장작불을 뒤적이곤

무심하게 날 바라보았다.


그 행동을 세 번 째쯤 반복했을 때,

문득 꿈의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사람의 시선.

수천 개의 눈동자.

어긋나는 박자.

흐트러진 음률.


몸이 움츠려든다.

분명 느슨하게 맨 목도리가

점점 목을 조여 오는 착각이 든다.


“여기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굳이 눈썰미가 좋다고 칭찬해주진 않았다.

누가 봐도 농로길과는 어울리지도 않은

청승맞은 복장으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당연한 유추였다.


대신 난

트렌치코트의 옷깃을 여미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눈도 다시 쏟아진다는데, 나 참.”


핀잔 속에 숨어있는 순수한 걱정을 느끼곤

내심 미안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경계심이 피어올랐다.


굳이

타인인 나를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는 이유가 뭘까.

수천 개의 눈동자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흔들며 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남자의 가식이 없는 순수한 걱정에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학생?”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직장인?”


고개를 저었다.


“뭐야, 스무고개도 아니고…….

됐어. 불이나 쬐다 가요.”


더 이상 관심 가지지 않겠다는 듯

다시 시선을 장작불로 옮기는 남자.


그의 빠른 포기에

안도와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더 이상 물어본다면

솔직하게 대답할 자신은 없으니까.


겁쟁이라 불려도 할 말은 없지만

거짓말쟁이가 되는 건 더 싫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장작불에 가까이 내민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작불.


바라보고 있자니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마저 든다.

식어버린 가슴,

타오르는 불.


묘하게 슬퍼져서 그만 눈을 돌려버린다.


“아. 한 대 좀 필게요.”


남자는

두툼하고도 낡아 보이는 녹색 야상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하얗고 네모난 종이 상자를 꺼낸다.

담뱃갑이었다.


능숙한 손길로 비닐을 벗기고,

담배 한 개비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찰칵 인다.


라이터는

좀처럼 불을 뿜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찰칵, 찰칵, 찰칵.


내 입술에 미소가 살짝 걸릴 정도가 되어서야

남자는 한숨을 쉬며

부지깽이 역할을 하고 있던 나뭇가지 끝을

지그시 달군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끝이 하얗게 변하고,

남자는 그걸 담배 끝에 갖다 댄다.


후우.


매캐한 담배연기가 내 코를 간질인다.

역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아무래도 좋을 법했다.


하지만 올라오는 기침은 참을 수 없었다.


“엣취!”

“엇, 미안요.”


모닥불 옆에서 멀찌감치 떨어지는 남자.


애써 기침을 멈추고

희미한 미소로 괜찮음을 드러내니

남자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불가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의자 대용으로 쓰고 있던

두툼한 나무둥치 위에 엉덩이를 댄다.


“어, 춥다.”


손을 모닥불에 갖다 대는 남자.

귀가 빨갛게 식어버린 걸 보니,

나나 이 남자나 도긴개긴으로 보여

웃음이 살짝 나와 버렸다.


“거참.”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담배 피우는 것에 집중한다.


남자와 나의 미묘한 거리.

그리고 미묘한 시간의 흐름.


잠깐인 듯 무한한 시간이

두 사람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남자는 이제 내게

별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지만

억겁 같은 찰나의 시간이 쌓이니

이젠 내가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래도 꽤 젊어 보이는데,

어째서 이런 추운 날,

하필이면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끝이 얼어붙었던 그날.

누군가의 벙어리장갑이 내 마음을 데워주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런 따뜻함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그와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

3화. 벙어리장갑

7.16(수)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어디론가 흘러가길 바라며 적어두었습니다.
혹시 다녀가신다면,
당신의 말 없는 감정도 함께 두고 가주세요.

구독과 댓글, 라이킷은
저에게 글을 계속 꺼낼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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