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꿈 이야기. 그 마지막 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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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수천 개의 눈동자. 그리고 어떤 한 남자.
얼어붙은 손가락에 건네진 따뜻한 벙어리장갑.
치유와 회복의 겨울 단편.
감성과 일러스트로 그려낸 따뜻한 이야기.
“농사, 짓는 건가요.”
멍한 눈으로 하늘만 바라보던 남자는
내가 말을 걸자
깜짝 놀랐단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벙어리가 아니었네. 목소리 좋네.”
이 남자 태연하게 엄청난 소리를 내뱉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벙어리라니.
물론 장애를 비하할 생각은 없었지만
비장애인으로서 이런 말을 들으면
당황할 수밖에 없을 테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뺨을 긁적이니,
남자는 팔짱을 끼며
입에 문 담배를 까딱거렸다.
“물려받았죠.”
“그렇군요.”
남자는 짧게 대답을 했다.
젊은 나이에 농사라니 대단한 일이다.
보통은 도회지로 나가
멋진 도시민의 낭만적인 삶을 꿈꾸지 않을까.
확신을 할 수 없는 건
내가 평범한 다른 사람들의
삶의 전철을 밟아온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피아노, 수천 개의 눈동자.
다시금 떠오른 기억을 잊기 위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히죽 장난스럽게 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뭐, 꿈이기도 했고.
북적거리는 건 도저히 안 맞아서.”
“꿈요?”
꿈이라니.
꽤나 소박한 남자다.
보통 이 나이의 남자들이라면
대기업이라든지 안정적인 공무원,
혹은 명성을 날릴 만한 일을
동경할 줄 알았건만.
특이한 사람인 걸까,
아니면 내 상식이 편향된 것일까.
“누구는 미쳤다고 하는데,
나만 좋으면 되는 거지.”
손가락이 욱신거린다.
피아노. 수천 개의 눈동자.
나를 불현듯 덮쳐오는 그림자.
“그쪽은 꿈이 뭐예요?”
남자의 질문에
떨리는 왼손을 주무르다
고개를 들어보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방금 만난 남자와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스몰토크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난 모양새였다.
물론,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이벤트로
만나게 된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굳이
이런 대화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무엇보다.
꿈 운운하며 쉽게
자기 현실을 받아들이고
만족해 버리는
저 태도에 질려버린 것 같다.
어떤 모종의 이유로
농사를 짓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저런 초라한 꿈이
삶의 목표고 이유가 된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피아노. 수천 개의 눈동자—
꿈을 이루었다는 말은
결코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 동안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남과 하는 대화주제가 아니야.
입술이 터지고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아도,
이가 바스러질 것 같이
악다물고 버티고 버텨서
손에 넣는다 해도,
모래알처럼
한 순간에 흘러내리는 게
진짜 꿈이잖아.
고작 현실타협의 결과물이
꿈을 이루었다,
라는 말이 될 수는 없어.
그건 거짓말이야.
“하.”
무심코 비웃음이 나오고 말았지만
전혀 맥락에 맞지 않는 반응이었기에
남자는 별 대꾸를 하지 않고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보 같아.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바보인 걸까.
현실이 항상
꿈을 반영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행복한 바보.
한없이 남자가 미워져,
그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아 뭐야. 치사하네.
난 쪽팔려도 말했는데.”
아.
쪽팔린다는 말에 그만
경계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네.
난 대체 뭘 생각한 거지.
흘러가는 말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이렇게 과민반응을 하다니.
좀 미안하기도 하고
마치 떼쓰는 어린 동생을 보는 기분도 들어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피아니스트요.”
“그래요?”
사실은,
꿈을 이루었던 적이 있었다.
피아노. 수천 개의 눈동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단독으로 무대 위에 올라가
타인의 시선 따위 느낄 새도 없이
유려하게 펼치던 나의 이야기.
그 선율에 심취해
일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그때의 오만함.
많은 것이 하찮았고,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무의미했다.
허무함의 끝을 내달린 오만함은
죄를 불러왔다.
죄는 벌을 내렸다.
그리고 내 왼손은 멈추고 말았다-
남자는 생각지도 못한 나의 대답에
흥미가 돋는다는 눈으로
날 빤히 바라보았다.
“와, 대단하네.
뭔가 고상한 분위기는 들었는데.
그럼 음대생?”
학생 아니라니까.
“흠. 아무튼 분발해 봐요.
인생 선배로서 하는 이야기니까
꼰대라 생각하지 말고.
하다 보면
나처럼 꿈을 이룰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 제 꿈을 이루려면
뭐가 가장 필요하죠?”
깊은 골짜기 안쪽까지 처박힌
내 음울한 목소리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남자는
까끌한 턱수염을
손으로 슥슥 문지르며
흠,
하는 소리를 낸다.
“글쎄. 뭐 여러 가지 필요하겠지.
우선 연습도 많이 해야 할 테고.
뭐 체르니? 하농?
뭐 이것저것 있잖아요.
게다가 예체능이라 돈도 많이 들 텐데.
아니 나보다 그쪽이 훨씬 잘 알 거 아녜요.”
손가락을 꼽으며 대답하는 남자의 말에
기운이 빠지고 말았다.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이 사람은 행복하다.
타협한 현실을 꿈으로 가장하고
애써 높은 이상을 외면하는
행복한 사람.
날아오를 날개보다는
대지를 걸을 두 다리를 선택한 사람.
태양이 얼마나 높이 떠 있는지를 모르기에
오히려 발바닥이 단단해진 남자.
보고 있으면
불쌍해서 역겨워질 정도다.
그러니 태연하게 이렇게 술술
아무렇지도 말을 내뱉는 거다.
손가락이 쑤신다.
문외한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걸
모르고 있어.
피아니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
본질을 몰라.
답답한 나머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손가락!”
“꿈을 꾸는 거겠죠.”
내 목소리는,
남자의 말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꿈을 꿀 수 있다는 거,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겠어요.
아무리 기준을 채우고 채워도,
결국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꿈을 꿀 수 없으면
거기서 멈춰버리는 거니까.”
피아노. 수천 개의 눈동자.
별이 부서지듯 무너져 내렸다.
내 추악하고 어두운 오만함,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를 깔보고 비웃던
내면의 내가
망치로 후 드려 맞아 깨져버린 기분이었다.
이렇게나 바보였다니.
이 바보가,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고생하고
극복하려고 했던 걸
이렇게 간단하게 부수다니.
“아.”
현기증이 돌아
잠깐 휘청거리다가
남자의 얼굴을 다시 노려보았다.
행복한 바보이자
애매한 이상론자.
현실을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평생 농사만 짓다가
결혼도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지.
누가 이런
시골 깡촌에 혼자 농사짓는 사람한테
시집가겠어.
혼자 속으로 악담을 퍼부었지만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내가 이렇게 추한 사람이라,
당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베베 꼬았어요.
그래도 당신의 말이,
당신의 목소리가
내 심장 깊숙한 곳을 두드렸어요.
정말, 화가 날 정도로
미안하고 고마웠다.
바보 같은 남자.
문득 눈물이 나왔다.
“어, 추워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니,
이 남자는
내 기분 따윈 전혀 알아주지 않는
무심한 말을 한다.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아니에요. 그냥 전—”
“잠깐만 기다려봐.”
남자는 허둥지둥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끈을 풀어내더니,
내게 건네준다.
끈의 끝에는,
보기에도 바보스러울 정도로 두툼한
벙어리장갑 한 쌍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자, 이거 껴요.
미래의 피아니스트를 위한 선물이니까.”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다.
진짜 정말 멍청한 남자.
추워서 그러는 게 아닌데.
정말,
누구랑 같이 살게 될 진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정말 고생할 것 같다.
아,
아까는 결혼도 못하고 홀아비로 죽을 거라
악담을 퍼부었지만
모를 일이지.
“낄 줄 몰라요?
거참. 손이 많이 가네.”
툴툴거리며 내게 다가온 남자는
내 목에 끈을 걸어주더니
일일이 벙어리장갑을
내 손에 끼어준다.
“따뜻하죠?
이거 군용이라 따뜻해요.”
따뜻하긴 따뜻했다.
어느새 내 손에 껴진 벙어리장갑.
군청색의 그 멋대가리 없는 둔한 장갑에,
온기가 가득 느껴진다.
장작불과 남자의 온기가 전해진 걸까.
왼손의 떨림이 잦아드는
착각이 들었다.
손에 껴진 벙어리장갑을 가만 보고 있자니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된 기분이 들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요.”
“가게요?”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뚝뚝 목소리의 남자의 말에
갑작스럽게 팍 화가 났다.
꿈 운운하는 바보이기 전에
진짜 바보인 거야?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태연하게 하는 사람은
정말 제정신인 거야?
내가 이상한 건지 남자가 이상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부아가 치밀었다.
가슴속 깊은 감정은,
잊고 있었던 온기와 함께
온몸의 피를 따뜻하게 데운다.
“저기요!”
남자는 갑작스러운 내 외침에
움찔 놀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곤란한데요.
온기가 돌아서인지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뜨거워졌다.
그만,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이 바보 같은 사람을
혼내주고 싶다.
행복한 바보에겐 벌이 필요하다.
세상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그리고 얼마나 차가운지
알려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스운 건,
그걸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가르쳐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바보 같이 말야.
남자의 팔소매를 낚아채며 끌어당기자
남자는 기겁을 하며 팔을 빼려 했다.
“어, 왜요. 잠깐, 어?”
“시끄러워요.”
물론 건장한 남자의 완력을 당해낼 순 없지만
워낙 얼결이라
제대로 저항하지 않고 끌려온 남자는
아직 조용히 타오르는 모닥불을 한 번 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이야기는 들어줄게요.
그렇게 꿈 이야기가 하고 싶었어요?”
하.
아직도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남자의 말에 진저리를 쳤다.
이 남자는
너무나도 소박한 남자다.
그런 주제에,
나한테는 그런 엄청난 꿈을 이루라고,
거기다가 격려까지 한 그런 남자.
어처구니도 없고
이제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심드렁하게 남자에게 대꾸했다.
“싸구려 커피에 입맛 버렸어요.
진짜 커피가 어떤 건지 보여줄 테니까.”
“어, 잠깐.”
잠깐의 저항.
하지만 무의미했다.
남자는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긁적인다.
그리고는 이곳에 올 때와는 반대로
내게 끌려 나가게 되었다.
모닥불은 아직도 타오르고 있었다.
꺼질 듯 말 듯,
타오르는 모닥불.
그 온기는,
이렇게 벙어리장갑에 옮겨져,
내 얼어붙은 손을 녹여주고 있었다.
손끝이 얼어붙었던 그날.
누군가의 벙어리장갑이 내 마음을 데워주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런 따뜻함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그와 그녀의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그와 그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모닥불을 쬐고,
커피를 마시며,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겁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어디론가 흘러가길 바라며 적어두었습니다.
혹시 다녀가신다면,
당신의 말 없는 감정도 함께 두고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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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글을 계속 꺼낼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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