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카게 살자"
21세기 극 초반 조폭들의 팔뚝에 있을만 한 문신의 문구일지도 모른다.
조폭영화에서 조연쯤 되는 행동대장의 팔에 저런 문구가 새겨진 문신이 있었다.
화면에서는 저 숭고한 다섯 글자를 보여주지만 결국 그는 또 나쁜 짓을 저지른다.
(종종 매우 주관적으로 착하게 살고 있다고 만족하는 게 문제 이긴 하다.)
언제쯤 차카게 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 숭고한 글을 자신의 피부에 아프도록 남겼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자기 객관화가 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나쁘게 살고 있으니 앞으로는 이 글을 보면서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글을 쓰다 보면 조폭이든 아니든 '착한 글'을 쓰려고 한다.
내가 착하지 않은 주제도 착하게 쓰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갖춘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것 같다.
(실제로도 그리 나쁜 놈은 아니다.)
21세기는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참 읽히기 좋은 세상이다.
블로그, SNS에 내 글을 쓰면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대니까.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의 글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게 되고, 글을 통해서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이렇게, 작가던 작가가 아니던, 이 시대에서 누군가가 쓰는 '글'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사진이 된다.
순수한 아이의 글을 보면 아이가 왜 아이인지 알 수 있다. 그 착한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행복한 사람이 쓴 행복한 글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분홍색 하트가 200만 개 정도는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글은 이렇게 그 사람의 마음을 스리슬쩍 보여주는 느린 사진이 된다.
기분이 안 좋아지는 사진, 불쾌해지는 사진을 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좋은 것을 보고, 시간을 들이는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기에.
사람들이 내 글을 보고 기분 좋아지고, 공감해 주기를 바란다면,
착한 글을 쓰게 되고, 정말 힘들어도 최소한 '착한 척'이라도 하면서 글을 쓰게 된다.
이게 세상에 나쁜 글보다 착한 글이 많은 이유일 것이다.
혼자가 되고 나면, 나쁜 생각이 참 많이 든다.
행복을 찾아 결정한 이별이지만, 남들이 모두 가지는 평범한 행복을 가지지 못했다는 비교에서 오는 불행.
든든한 가장에서 갑자기 일개 노총각이 되어, 아저씨 냄새 풀풀 풍기다가 외롭게 살다 죽지는 않을까란 불안.
나를 통제하는 그 누구도 없으니 더 세속적이고 자극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유혹.
이 불행, 불안, 유혹에 물들다 보면 차카게 살 수 없다.
'차카게 살자'라는 생각도 안 하게 된다. 그냥 막 살기 딱 좋은 환경이다.
나는 불행과 불안, 유혹 속에서 흔들리는 시간을 보내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엄청 대단한 글도 아니었다. 그냥 돈 몇 푼 더 벌어보겠다는 경제 관련 글이었다.
그런데 이 별거 없는 글을 쓰는데도,
사람들이 자주 오고, 오랫동안 보게 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착한 글을 쓰고 있었다.
공감을 이끌어내고, 인사이트를 주고, 좋은 생각을 나누는 글.
그런 글을 써야 사람들의 반응이 더 좋으니까.
몇몇 반응이 생기니 더 좋은 글을 쓰게 되었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문구를 발췌하고, 내 생각을 얹어서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더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좋은 글을 쓰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글을 쓰지 않고 일상생활을 할 때, 뭔가 내가 쓴 글이 생각났고, 행동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카네기 인간관계론을 읽고 쓴 서평에서 소개하는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6가지 방법' 중 두 번째 방법인 '웃어라.'에 대해서 쓰게 되니, 다음 날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아마 이렇게 글을 다시 썼으니 오늘 하루도 내 볼과 입 사이의 근육은 평소와 다르게 텐션이 올라갈 것 같다.
기분 좋은 아침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니체의 말을 인용하여 글을 쓴 적이 있다.
"하루를 좋은 출발로부터 시작하고 싶다면 눈을 떴을 때 오늘 하루 중에 적어도 한 사람에게, 적어도 한 가지 기쁨을 나눠줄 수 없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누구에게 기쁨을 줄 수 없는지 생각하게 되고, 옆자리의 직장 동료에게라도 기쁨을 주기 위해서 안 하던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글쓰기의 효과가 미라클 모닝이라고 이틀 전에 써두고, 그날 회식을 해서 어제는 아침에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죄책감이 들었다. 이게 뭐라고 죄책감까지 들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이 죄책감을 털어내고자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이중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은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을 공적으로 할수록 더 잘 지키려고 한다.
표리부동한 사람이 되기 싫은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착한 글을 쓰면 착하게 행동해야 하고,
나쁜 글을 쓰면 나쁘게 행동해야 한다.
글을 쓴 이후로는 그 글이 내 삶의 구심점이 되어 돌아가게 되니까.
이렇게 어떤 글을 쓰느냐에 따라서 나의 행동은 달라지게 된다.
뇌과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 Realization = Vivid Dream이라는 옛 시크릿의 성공공식.
-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긍정확언
- 본인 목표를 시각화해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기 등등.
결국 내 뇌에게 지속적으로 내가 살아야 할 지향점을 인풋 시키는 행동이다.
하지만 상상(Vivid Dream)하는 것, 말로 확언을 하는 것, 사진 한번 보는 것보다 강력한 것은 바로 글쓰기일 것이다.
글쓰기가 더욱 강력한 이유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고, 내 착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저 밑에 있는 좋은 단어를 고민해야 하고, 논리적으로 구성하다 보면 뇌는 집중하게 되고 바쁘게 돌아가게 된다.
단순히 상상하고, 외치고, 사진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자극을 뇌에게 주게 된다.
운동을 처음 시작하게 되면 알이 백이거나, 굳은살이 생기고 가끔 피도 나게 된다.
사용하지 않던 어느 부분에 집중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고 계속하다 보면 굳은살과 피는 어느새 나와 하나가 되어 그 운동을 잘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글쓰기는 이런 자극과도 같다. 처음엔 좀 이상한 느낌이 들고 부조화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계속 쓰다 보면, 그리고 조금씩 변하다 보면 내가 착하게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별을 했어도,
시험에 불합격했어도,
직장에서 잘 풀리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껴질 때도,
사랑을 믿는 글을 쓰고,
용기를 주는 글을 쓰고,
열정에 대한 글을 쓰고,
외롭지 않은 글을 쓰면,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기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며,
다시 노력할 열정이 생기고,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된다.
이렇게 글쓰기는 내 삶과 운명을 좌우하는 힘이 있다.
내가 쓴 글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내일도 모레도, 착한 글을 많이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