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으로 채워줘요. 사랑의 배터리가 다 됐나봐요~" 홍진영의 노래가사처럼 우리는 사랑의 배터리가 채워지면 결혼을 하게된다.(물론 안타깝게도 아닌 경우도 있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이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은 금세 변해버리고, 배터리가 방전되듯 사랑이 점점 줄다 보면 서로에 대한 마음은 굳어버린다. 켜지지 않는 핸드폰을 '벽돌폰'이라고 하는데, 마치 내 마음은 벽돌과 같아진다.
이 벽돌은 너무나도 차갑고,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진다. 그냥 쌓아두기만 할 뿐이다.
연애 초기, '운명적인 것 같은' 사랑에 빠진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좋고, 모든 것을 다 챙겨주고 싶으며, 생각만 해도 참 좋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를 사랑해 준다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적인 결혼 생활에서는 이 사랑의 배터리를 방전시키는 요소가 너무나도 많다.
1.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독립적인 성향(95%) : 대한민국의 결혼 제도부터가 한 사람에게 꽤나 의존적인 제도였다. (물론, 최근에는 많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집은 남자가, 혼수는 여자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적당히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한데 독립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다 내가 할 테니 몸만 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사랑에서 시작한 관계가 경제적 의존과 독립에서 처음으로 현실과 대면하게 된다. 배터리가 5% 정도 훅 닳아버린다.
2. 변화에 대한 불응(90%) : 결혼을 통해서 환경이 변하고, 각자의 역할이 달라졌지만 사실 변하기는 쉽지 않다. 연애 때 잠시 변화하는 것처럼 보였던(아니면 내가 착각했던) 나와 상대방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배터리는 90% 정도만 남게 된다. 그래도 아직은 쓸만하다.
3. 갈등의 발생 그리고 지속(80%) : 이런 변화에 대한 불응은 크고 작은 갈등으로 터지게 된다. 연애시절 사랑싸움 하던 갈등과는 차원이 다른 갈등이다. 연애시절에는 주로 개인과 개인이 싸웠다. 하지만 결혼 후의 갈등은 나와 상대방의 집안과의 갈등, 나와 상대방의 습관과의 갈등 등 다양하다. 갈등이 발생하는 건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갈등이 지속된다면 배터리는 10%가 훅 떨어지게 된다.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다.
4. 소통부족(60%) : 갈등이 지속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통이 부족해진다. 싸웠기 때문에 대화를 안 하고, 더 이상 싸우지 않기 위해 대화가 줄어들게 된다. '갈등을 해결하는 의사소통 방법'을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지만, 그런 건 가르쳐주지 않는다. 독립적인 성향이 늘어나고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이 소통의 부족은 참 중요한 부분이다.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대화가 줄어들고 안 하기 시작한다면 배터리는 60%까지 확 줄게 된다.
5. 무시와 방치(50%) : 갈등을 피하고자 소통이 줄어들게 되면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다. 이 사라진 관심은 무시와 방치로 나타난다. 외로워진다. 이럴 거면 왜 결혼했는지에 대한 생각이 든다. 이제 사랑은 50%밖에 남아있지 않는다.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6. 존중의 부재(45%) : 마음이라는 것은 '땅'과 비슷하다. 좋은 것을 계속해주면 꽃과 나무가 자라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가뭄이 생긴 바닥처럼 땅이 쩍쩍 갈라진다. 무시하다 보면 존중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무시와 방치의 연장선상이기에 배터리는 5% 정도 닳게 된다.
7. 부정적인 태도와 비판(40%) : 상대방의 모든 것에 날이 서게 된다. 집에 앉아 있는 것, 누워 있는 것조차 꼴 보기가 싫어지게 된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비판적으로 변해있다. 아무리 잘해줘도 무언가 의도가 있는 것 같고, 안 하던 짓을 하면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 40% 정도의 배터리만 남아있다. 이대로는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없다.
8. 불평등과 불공정(30%) : 이 결혼생활은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의 노력에 비해 상대방의 노력은 너무나도 하찮게 느껴진다. 이러한 감정은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한다. 월급, 육아시간, 가사노동시간, 부모님 케어와 관심 등등. 이 생활에서 나의 기여도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훗날 재산분할까지도 고려하면서... 물론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기여도는 상대방이 생각하는 그것보다 훨씬 많다. 이러한 비교는 참 비참하고 교만하게 만들기에 30% 남짓 사랑이 남아있게 된다. 얼른 콘센트를 찾으러 가야 한다.
9. 정서적 또는 신체적 학대(20%) : 배터리가 30%밖에 남지 않았다. 콘센트를 찾아야 하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급해진 마음은 더 공격적인 성향이 되어 상대방을 대하게 된다. 마음이 급해지니 말과 행동에 더더욱 날이 서게 된다. 더 공격적인 사람이 덜 공격적인 사람을 학대한다. 덜 공격적인 사람도 어떻게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관계형성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에... 20%. '저전력 모드로 전환하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본다.
10. 신뢰 상실(방전) : 이런 학대는 그나마 붙잡고 있던 '변화가능성'이라는 동아줄을 잘라버린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게 된다. 일말의 희망이 없어지게 된다. 방전이 되고 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 벽돌이 되어버린다.
항상 100% 완충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배터리를 쓰면 좋겠지만, 이는 배터리 효율도 좋지 않을뿐더러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매일 케이블만 꼽고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배터리가 90% 이상이면 참 마음이 편하다.
이 90% 이상의 배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갈등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관건이다.
갈등만 잘 해결해도 90% 이상을 항상 유지할 수 있기에..
연애를 하면서 갈등은 많았지만, 처음 해보는 결혼생활에서의 갈등은 참 낯설었다. 갈등의 스펙트럼은 참 넓었다. 단순히 시간약속, 늦은 연락과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집안문제, 경제문제, 잠자리 등 생전 경험해보지 못했던 주제들로 갈등이 벌어졌다.
배터리가 팍팍 줄고 있는 순간이었는데, 콘센트를 찾지 못했다. 추운 날씨에서 하염없이 떨어져 가고 있는 배터리만 바라볼 뿐이었다.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모르다 보니 지속되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사라지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갈등을 피하기 위한 나의 답은 '싸울 바에 이야기를 하지 말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답이 갈등을 100% 없애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나를 최대한 숨겼다. 싸우지 않을 수 있는 말만 골라서 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 내뱉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참 어리석었다. 이야기를 안 하게 되니, 내 배터리는 마치 3년 이상 쓴 핸드폰의 배터리처럼 금세 닳게 되는 배터리가 되었다. 전화 한 통 하면 10%씩 뚝뚝 떨어지는 저효율의 배터리가 되었다.
저효율의 배터리가 되고 나니 무시와 방치를 지나 신뢰 상실까지 급속도로 떨어지게 되었다.
배터리를 교체하고 싶어도 한번 정립된 관계에서 새로운 배터리로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마음이 벽돌이 되었다.
지금 이 벽돌이 얼마나 충전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보아하니, 아직도 정상작동을 할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아직은 부족하다. 그런데 배터리의 충전방법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지고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배터리 충전에서,
나를 위해 사용하는 배터리를 충전하고 있다.
한 번 방전되고 새로 얻은 내 새 배터리는 소중하니까.
이제 또 방전되면 안 되니까.
잘 충전해 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