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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자 Feb 09. 2024

면교 가는 길 : 현관문에서 받는 세배

민족 대명절 설날이다. 

가족, 친척들과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줄만 알았던. 


이혼을 하고 깨달은 건, 모든 사람이 명절을 보내는 모습이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양가가 멀지 않고,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던 나는, 다들 명절에는 나처럼 지내는 줄 알았었다. 할머니 댁에 갔다가 하루 자고, 차례를 지내고, 점심을 먹은 이후에는 외갓집을 가고, 친척들을 만나고, 세배도 하고 용돈도 받고...


그런데 이혼을 하고 난 이후의 명절은 꽤나 달랐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니, 다양한 사람들의 명절을 보내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길거리를 혼자 걸어가는 사람, 아빠나 엄마, 단 둘이 다니는 아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다니는 아이들 등등. 


공주가 아빠, 할머니와만 오늘 하루 보냈던 것처럼, 다들 무언가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전 사람에게 사진이 몇 장 왔다. 한복을 입고 있는 공주 사진이었다. 아마도 어린이집에서 세배 교육을 시키는 것 같았다. 야무진 표정으로 한복을 입고서는 좋아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공주 같은 느낌이 든다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좋아했다.  

그 사진을 보면서, 한복을 이쁘게 입히고, 양가 부모님께 다니면서 귀여움을 받는 공주를 생각해 봤다. 참 좋은 그림이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엄마와 함께 공주를 보러 서울로 향했다. 키즈카페를 간다고 이야기도 안 했는데, 아마 전 사람은 나와 상의도 없이 아빠가 키즈카페를 데려간다고 했나 보다. 


사실, 계획에 키즈카페는 없었는데, 공주는 "키즈카페 가자~"를 계속 이야기한다. 그러니, 안 가기도 뭐 하고.. 그래서 일단 동네 키즈카페에 가서 공주가 좋아하는 '점프점프'를 시켜준다. 설 연휴에도 열어서 다행이다.  

한껏 신난 공주는 집에 가기도 싫어하고, 아주 키즈카페에 눌러 살 기세다. 그래도 공주가 좋아하니, 나도 좋다.  


원래는 설빔을 사주러 가려고 했다. 그리고 아울렛 내부에 구경거리도 많기에 겸사겸사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키즈카페에서 간신히 공주를 데리고 나와서, 근교에 있는 아울렛으로 향한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공주. 

두 돌이 갓 지났지만 취향이 확실한 공주.

자기가 좋아하는 옷 아니면 안 입는 공주. 


공주가 좋아하는 고양이가 그려진 브랜드에 가보니, 이쁜 원피스가 눈에 띄었다. 공주가 입으면 너무나도 이쁠 것 같아서 몇 개를 골라서 공주에게 보여준다. 


"보라색, 분홍색, 흰색 중에 어떤 게 맘에 들어?"

"이거랑, 이거가 맘에 들어!"

"그럼 둘 중에는 뭐가 맘에 들어?"

"이게 맘에 들어!"

공주는 분홍색 원피스를 고른다. 


"그럼 이거 사주면 입을 거야?"

"아니! 아기상어 보러 가자!"


엥..??


그때, 공주가 좋아하는 하트모양이 도배되어 있고, 가운데 고양이가 그려진 핑크색 맨투맨 상하의 세트가 보였다. 


분홍색, 하트, 고양이 딱 공주에게 취향저격일 것 같았다. 


"공주 그럼 이건 어때? 공주가 좋아하는 고양이랑 하트가 엄청 많아!"

"하트하트하트! 여기 고양이도 있네!?" 하더니

옷을 꼭 안는다. 

"이거 집에 가져가자!"


공주 같은 이쁜 원피스를 사주려고 했지만 결국 맨투맨이다. 원피스는 애비의 욕심이었을까. 지난번 크리스마스 때 비싼 점퍼를 사주었지만 입지 않는 걸 본 이후로는 옷을 사주는데 신중해졌다. 그리고 수요자 중심의 선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이거 주세요"


선물이 맘에 들었는지, 공주는 큰 쇼핑백을 직접 들겠다고 한다. 

이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주변 사람들이 다들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공주가 좋아하는 고기가 많이 들어있는 갈비탕을 먹고 공주를 데려다준다. 

데려다주고 현관을 나서는 길. 

공주와 작별인사를 한다. 


"공주 안녕~ "


현관문 앞에 선 공주가 고개를 숙이면서

"안녕히 가세요!"를 외친다.

"응 안녕~"이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숙였던 고개에서 무릎까지 구부려지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여!"

라고 세배를 한다. 


하. 

내 새끼가 하는 첫 세배.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훅 들어왔다. 


세배란 자고로..

명절 당일, 할머니 할아버지가 거실에 앉아계시고, 공손하게 세배를 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면접교섭이 끝나고 돌아가는 현관문 앞에서 딸에게 세배를 받는 느낌이란...

그리고, 손녀딸에게 세배를 받는 할머니의 느낌이란...


명절의 모습이 모두가 다르듯, 

설 연휴, 세배의 모습도 모두 다를 수 있다.


조금은 다른 모습이지만, 조금 특별하지만.

그렇게 나도 내 새끼에게 세배를 받는 아비가 되었다. 


할머니는 세뱃돈 주머니에 세뱃돈을 넣어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애비의 눈가는 갑자기 촉촉해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수십 초의 시간. 

고개를 돌리고 티 나지 않게 눈물을 삼키고 있다. 


그래도, 그래도, 

간신히 참았다. 


티가 안 난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 눈물을 들키면 엄마도 맘이 아플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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