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음파에서 아이의 구순열을 발견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이해받았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 내 결정을 부모님이 ‘허락해준것은’ 그것을 이해하거나 나를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서였다.
난 이것이 단순히 부모님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단지 주파수가 잘 안 맞는 사람들인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서로 대화하는 법도 잘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주노를 임신하고 구순열 진단을 받았을 때였다. 부모님은 그 소식을 전하는 내 앞에서 하염없이 우셨다. 너무 우셔서 대화가 불가능했기에 잠시 전화를 끊고 부모님이 진정하시기를 기다려야했다. 다시 통화를 했을때 부모님은 내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이를 지우는 것이 어떨까.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씩씩하고 건강하게 말했다.
“그럼 엄마 아빠도 내가 구순열이란걸 미리 알았다면 나를 지웠겠네? 근데 그럴 필요 있을까? 나 이만하면 잘 자라지 않았어요? 이전 사람하고 결혼 반대 겪은거 말고 내가 그걸로 큰 어려움을 겪은 것도 아니잖아?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네가, 그런 아이를 키우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라서 그래.”
엄마는 다시 우셨다.
나는 산부인과에서 이 소식을 듣자마자 부모님께 알렸다. 산부인과에서 그 소식을 들은 내 반응은 그랬다. 의사 앞에서 매우 담담히 소식을 듣고 의례적인 말로 위로하는 의사에게 나는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병원을 나와 괜찮냐고 묻는 님의 말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그 때 왜 눈물이 밀려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구순열이 슬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눈물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부모님의 반응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내 기분이나 생각이 어떤지 묻지도 않고 그건 나에게 나쁜 소식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감정이 내 것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앞에서 마음껏 슬퍼했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구순열이 슬픈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당신들에게 비극적이었기 때문에 내게도 비극적이라고 정의하는데서, 그리고 나의 생각이나 기분은 고려도 하지 않는데서 나는 속이 상했다. 당신들이 나의 구순열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언정 나도 똑같이 힘들라는 법은 없지 않나. 내가 괜찮다는데 왜 당신들이 알아서 먼저 슬퍼하는가.
‘너는 내가 아니다.’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태도 중 하나가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불평말며 살아야지.” 이다. 당신보다 신체가 불편하다고, 당신보다 가난하다고, 당신은 누군가의 상황을 불행하게 볼 수 있겠지만 정작 당사자는 자신의 상황을 인생의 빼기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은 그 사람이 아니다. 당신 마음대로 그 사람의 상황을 ‘불쌍하거나 안된’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울하거나 힘든 것으로 볼 권리는 그 사람, 본인에게만 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경청인 것 같다. 먼저 판단하지 않고 잘 듣는 것. 그리고 나의 답을 주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대답을 생각할 수 있게 질문을 하는 것.
나의 부모님이 내게 해주지 못 했던 것. (그렇다고 그분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분들의 방식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자랐고 받은 사랑 모두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돌려드리고 싶다.) 그것을 나는 주노에게 해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