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아무르 Apr 28. 2022

04. 취향을 가진 다는 것

그림책 <오싹오싹 당근>, <오싹오싹 팬티>

다경이에게,


오늘은 일요일이야. 그간 코로나 때문에 준호는 2주간 학교에 가지 못했고, 나는 2주간 두 아이, 그리고 재택근무 하는 남편과 지지고 볶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네 편지도 빨리 읽고 싶고 답장도 빨리 하고 싶은데 도저히 틈이 나질 않더라. 밤에 써보려고 노력해도 잠은 왜 또 그렇게 쏟아지니. 어서 답장하고 싶어서 주말만 기다렸어. 남편이 준호와 놀아주는 동안 나는 자는 리아 옆에서 네게 편지를 쓰고 있어. 아마 이 편지도 오늘 완성할 수는 없을 거야. 곧 리아가 깰 터이고, 아이들은 간식 타령을 하겠지. 아침부터 내내 준호와 놀아준 불쌍한 남편도 구해줘야 할거고. 갑자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마구 빨라지는 느낌인데? 


아이들 기질이 다들 다른 거 보면 참 신기해. 특히 같은 부모 아래 태어난 형제 자매가 다를 땐 더 신기한 것 같아. 준호와 리아는 기질이 완전히 반대야. 준호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기질이고 리아는 순한 기질의 아이이지. 준호 신생아 때는 신생아들은 먹고 자는 것 밖에 안한다는 말이 의아 했어. 준호는 정말 많이 울고 잘 안 자는 아이였거든. 그래서 먹고 자기만 하는 신생아가 어떤 건지 몰랐는데 그런 애가 정말 있더라! 리아를 보면서 얼마나 감탄을 했던지. 리아가 18개월 즈음 되었을 땐가 같이 블록 쌓기를 하는데 무너지는 블록을 보고 울지 않는거야. 자연스럽게 무너진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건 뭐지! 싶었어. 주노는 블록이 무너지면 불같이 화를 내고, 울고, 그나마 남은 블록까지 다 부수면서 다시는 안한다고 했거든. 아무리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다시 하면 된다.' 그렇게 말해줘도 실망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더라. 그때는 ‘아이 성격이 왜 이렇게 힘들까’ 한탄을 많이 했는데, 5년을 키우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어.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들도 순한 기질의 아이들처럼 행동할 수 있는데 다만 배우고 연습해야하는 부분이 남들보다 더 많고 오래 걸린 다는 것. 그래서 부모도 많이 공부하고 많이 참아야 한다는 것. 준호와는 아직도 많은 배움과 인내가 진행 중이야. 그런 의미에서 준호에게 ‘영심이’ 주제가를 들려줘야겠어. 매일 잔잔하게 배경음악으로 틀어놓고 아이를 세뇌시키는 거지! 어때? 나의 완벽한 계획이! 


우주의 통제 성향 이야기를 읽고 ‘우리 다경이 엄청 고생했네.’ 생각했어.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가득하던데! 나에겐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이 아닌데 아이에게는 30분이 넘게 울고 불고 할 일이라는 서로의 입장 차이와 아이에게 중요한 것을 지켜주기 위해서 고생하는 건 아이가 아니라 부모라는 점 때문에 이런 상황이 힘든 것 같아. 고생했어. 토닥토닥. 하지만, 알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으라차차 힘내라! 


아니, 그건 그렇고, 뭐! 네가 통제 성향이 있다고! 믿을 수 없다! 나한테 너는 학교 옥상 같은 사람이었어. 우리를 꽁꽁 싸매고 단단하게 조이는 학교에서 잠시 벗어나 숨을 쉴 수 있는 곳. 탁 트인 하늘이 보이는 곳. 너는 왠지 그 옥상처럼 자유로운 사람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다.


나도 나름 강박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강박이 전혀 없는 사람을 만나서 살다 보니까 홧병 나는 것 보다는 강박을 포기하는게 나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서서히 포기하다 보니 지금은 꽤 대충 사는 사람이 되었어. 내 편지에 첨부된 그림책 사진들 봤지? 사이즈 하나도 안 맞고 사진도 대충 찍었잖아. 아, 그러고보니, 네 편지에 첨부된 그림책 사진들, 정확하게 그림에 맞춰 네모나게 잘린 뒤, 정갈하게 첨부된 그 사진들. 맞네, 너 완벽한 디테일을 사랑하는 강박이 있구나! 헤헤.


네가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이야기를 하면서 그림이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이 정말 좋다고 이야기 했잖아. 그 부분을 읽고 띠링! 생각난 책이 두 권이 있어. 바로 <오싹오싹 팬티>와 <오싹오싹 당근>이야. 이 두 권의 책은 에런 레이놀즈가 글을 쓰고 피터 브라운이 그림을 그렸는데, <오싹오싹 당근>이 먼저 세상에 나와 ‘칼테콧 아너상’을 받으며 엄청난 성공을 하고, 그 다음 시리즈로 <오싹오싹 팬티>가 나왔어. 


어느 날 준호와 그림책 광고지를 보는데 준호가 <오싹오싹 팬티>의 표지를 보고는 읽고 싶다고 하더라고. 어떤 표지였는지 볼래? 짜잔.



무서운 이야기 좋아하는 준호 취향에 딱 이었지. 만 세 살 짜리가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건 참 귀여운 일이야. 무서운 이야기 엄청 재미있게 봐놓고 밤이 되면 그 이야기가 생각나서 잠을 못 자겠다고 칭얼거리는 약한 모습을 보이거든. (근데 중요한 건 그 무서운 이야기가 그렇게 무섭지도 않다는 거지.)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고, 그래서 무서운 이야기는 아예 피했거든. 근데 무서우면서도 재미있어 하고 돌아서면 또 무서워하는 이 모순덩어리가 너무 이해가 안 가면서도 귀엽더라.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무시무시한 팬티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달라던 어떤 초등학생의 부탁에서 시작되었대. 나랑 준호 둘 다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준호는 무서운(귀여운) 이야기가 좋은 것 같고, 나는 이 어린이 버전 호러가 아이의 시선으로 장르의 공식을 따라가는게 흥미로웠어. 특히 그림의 구성이 완벽해. 호러 영화 콘티 보는 기분이거든. 우리가 또 영화를 공부한 엄마들 아니겠니! 너도 보면 감탄할 거야. 정말 진정한 장르 영화, 아니 그림책 이라니까! 



봐 바.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지? 그러다 우연히 <오싹오싹 당근>의 광고를 보게 되었어. 준호는 당장 이 책을 읽고 싶다고 했지. 하지만 해외에 사는 우리는 당장 그 책을 구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한국의 가족들에게 이 책을 부탁해 두고 급한 대로 인터넷에서 책의 그림들을 찾아보았지. 그랬더니 앞의 몇 장을 볼 수 있었어. 그런데 준호는 앞 몇 장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다음을 보여달라고 성화였어. 한국이 멀어서 책을 금방 받을 수는 없다고 설명해봤지만 당연히 소용은 없었지. 그래서 나는 꾀를 냈어. 


“준호야. 우리가 이 다음 이야기를 만들어 볼까? 책 제목은 오싹오싹 당근. 지은이 준호 고티에. 어때?”


나의 꾀는 성공이었어. 우리는 책의 표지를 만들고 책의 앞부분을 인쇄해서 붙였으며 그 다음 부분의 이야기를 만들어 갔지. 준호는 글을 못 쓰니까 아이가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해주면 그림 옆에 내가 글을 적어 주었어. 한국에서 진짜 <오싹오싹 당근>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고티에 준호 씨의 <오싹오싹 당근>을 읽었어. 



그리고 <오싹오싹 당근>이 드디어 도착했지. 난 정말 이 책의 그림 구성을 보고 감탄 했어. 완벽한 호러 영화 콘티처럼 느껴졌거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책 소개를 읽어 보니, 그림 작가가 이 그림책을 만들 때 고전 스릴러 영화를 많이 참고했대. 



이 책을 보면서 육아 기간 동안 잠시 잃어버렸던 영화에 대한 사랑을 찾았던 것 같아. 좋은 영화를 보면 잠 들지 못하고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고 글을 쓰던 때의 흥분이 이 그림책을 보며 잠시 돌아왔어. 나는 가끔 영화를 하겠다고 하는 준호를 상상할 때가 있어. 그 길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힘든 길인지 잘 아는데도 그런 준호를 상상하면 너무 신나는 거 있지. 뭐, 꼭 직업으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 나랑 같이 영화에 대해 수다를 떨게 된다면 얼마나 신이 날까, 열정을 나누는 사람이 내 자식이라니, 정말 재미있겠다, 그런 상상을 해.


그래서 나를 집에 있는 엄마로만 알던 준호에게 예전에 내가 한 일에 대해 이야기해줬어. 엄마는 극장에 나오는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야. 그리고 내가 만든 작은 비디오들도 보여주며 어떻게 편집하는지도 보여주었지. 그랬더니 나들이 하던 어느 날 그러더라고. ‘엄마, 이거 찍어봐. 이걸로 영화 만들어.’ 그래서 열심히 찍었는데 아쉽게도 편집은 하지 못했어. 내가 아이에게, 돌봐주는 사람을 넘어서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기뻤어. 그래서 누구에게든 좋아하는 것이 필요한가봐. 역할이 주어진 이름 (엄마, 아내, 딸 등) 말고, ‘나’로 존재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최근에는 준호가 장난감 카메라로 비디오를 찍기 시작했어. 유투버 영상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혼자서 유투버 마냥 카메라 앞에서 말하고 이것저것 찍어서 상상 속 사람들에게 보여주더라고. 나중에 보면 이불킥 할 영상들 참 많아. 스무 살 생일에 편집해서 서프라이즈로 틀어줘야겠어. 모두들 엄청 웃겠지? 


준호와 리아가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어. 좋아하는 것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가 누군지 알아가는데, 그리고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그러려면 나부터도 취향을 가져야 할테고, 또,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준 뒤, 그 중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잘 찾아내어 더 깊게 알아가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줘야겠지. 


네게 이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갑자기 가슴이 설렌다. 일을 그만 두고나서, 온 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것 같은 일을 해본 지가 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바로 지금, 세포들이 타닥타닥 깨어나는 느낌이 들어. 시들어가는 화분 속 식물 같던 내게 물을 준 너, 오싹오싹 시리즈, 그리고 나의 준호에게 감사를 보낸다. 


참, 이 책들을 읽어볼 기회가 있다면, 뒷면에 작가 소개가 있는데 꼭 읽어봐. 유쾌해. 



아무렴 어떠리한 하루를 보냈기를 바라며,

민영




글 : 에런 레이놀즈

그림 : 피터 브라운

역 : 홍연미


토토북 | 2018년

원제 : Creepy pair of underwear!


#팬티스릴러 #오싹오싹 #아이가_좋아하는_그림책










글 : 에런 레이놀즈

그림 : 피터 브라운

역 : 홍연미


주니어 RHK | 2020년

원제 : Creepy Carrots!


#유쾌 #반전 #고전스릴러패러디

매거진의 이전글 03. ‘통제'와 '강박'에서 자유로워지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