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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Apr 21. 2022

03. ‘통제'와 '강박'에서 자유로워지기

그림책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언니!

언니의 편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을 보자마자 정말 얼마나 설렜는지 몰라. 하필 주말이라 편지를 받고서 바로 읽을 수가 없었는데, ‘엄마’를 불러대는 아이를 요리조리 피해 겨우 편지를 다 읽고 났더니 편지를 읽기 전보다 더 설레고 흥분이 되는 거야. 빨리 언니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싶어서 입과 손이 근질거리는 주말을 보내고 이제야 겨우 컴퓨터 앞에 차분히 앉았어.


나는 어렸을 때도, 지금도 성장에 대한 욕구가 큰 편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특히나 아이들은, 내가 어렸을 때 떡국을 두 그릇, 세 그릇 먹으면서 나이를 더 먹고 싶어 했던 것처럼, 모두 빨리 크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일곱 살까지만 크고 싶다는 준호의 이야기가 정말이지 새롭게 다가왔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우주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좌절은 크지 않은 것 같아.(우주가 아기였을 때부터 남편이 ‘영심이’ 주제가를 자주 불러주었는데, 지금도 뭔가를 할 때 혼자서 흥얼거리곤 해. ‘해봐, 해봐, 실수해도 좋아’하면서.)

우주는 오히려 할 수 있든 없든, 무엇이든 자기가 해보려고 하고, 해야만 하는 자기 주도적인 아이인데 문제는 이게 지나치다는 거야. 게다가 통제 성향이 굉장히 강하기도 해.(오은영 박사님이 이 두 가지 성향이 이어져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 어떨 때는 강박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이런 성향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터져 나와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어.




한 번은 회사에서 반반차를 내고 빨리 집에 간 날이었어. 당연히 일찍 집에 온 나를 보고 우주가 반가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밖에서 아빠랑 놀다가 집에 들어온 우주는 나를 보고 갑자기 분노를 터뜨리는 거야. ‘엄마 집에 없어’, ‘엄마 집에 없어’ 하면서. 집에 가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던 우주에게 불 켜진 집과 엄마의 존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던 거지. 한참을 엄마가 집에 없어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울던 우주는 나에게 화장실에 들어가라고 했어. 집안의 불을 다 끄고 난 후에 우주는 아빠와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고, 화장실에 숨어있던 나는 다시 퇴근을 한 척 나오고서야 상황이 정리됐어. 물론 우주가 제 기분을 되찾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어느 날은 목욕을 하고 나온 아이 얼굴에 로션을 발라줬는데, 그게 너무 싫었나 봐. 수건으로 얼굴이 벌게지도록 박박 닦더니 그것도 부족했는지 결국 처음부터 다시 목욕을 해야 한다고 우겨서 그날 우주는 목욕을 두 번 했다니까. 씻는 걸 끔찍이 싫어하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우주는 자기가 생각한 것에서 뭔가가 어긋나거나 마음에 안 들면 모든 걸 다시 처음부터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야.

그런데 도저히 다시 해줄 수 없는, 불가능한 것들이 있잖아. 언젠가는 내가 볼일을 보고 나서 물을 내렸는데 그 앞에서 날 기다리던 우주가 또 뒤집어진 거야. 자기가 변기 물을 내려야 하는데 내가 먼저 내렸다고 다시 앉아서 볼 일을 보라고 생떼를 쓰는데 숨이 턱 막혔어. 도대체 왜일까? 자기가 볼 일을 본 것도 아니고, 자기가 물을 내리겠다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든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주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어.

더 어렸을 땐 그냥 물을 다시 한번 내리는 걸로 무마가 되기도 했고, 다른 것으로 관심을 돌려서 상황을 벗어나는 게 가능했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통하지 않으니 그런 순간에 나는 그냥 얼어버리고 말아.

이런 날들이 쌓이고 쌓이다 요즘은 뭐든 자기한테 허락을 받으라고 하는 통에 매일 뚜껑이 열릴락 말락, 매 순간 인내심 테스트라도 받는 심정이야. 아이들이라는 존재가 원래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 하고, 감정 표현이 서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싶으면서도 지나치게 모든 걸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이 아이를 도대체 어디까지 받아주고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걸까, 매일매일 고민이 끊이질 않아.


그런데 있잖아, 뭐든 다 자기가 통제하려고 하고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분노가 폭발하는 우주를 찬찬히 보다 보니 그 안에 내가 보이는 거 있지. 다이어리나 노트의 첫 번째 페이지에 쓴 글씨가 마음에 안 들면 뜯어내고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썼던 예전 내 모습과 모임의 흐름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갈 수 있게 음식을 먹는 타이밍과 다음 메뉴를 꺼내올 타이밍 등 사소한 것들을 끊임없이 관리하던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어. 휴지통 아이콘 달랑 하나 놓여있는 나의 컴퓨터 바탕화면과 모든 앱들이 카테고리 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나의 휴대전화까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바로 통제 성향도 강하고 정리 강박까지 있는 사람이더라고.

아이가 어릴 때는 어떤 육아책에서 본 대로 ‘먹·놀·잠’ 패턴을 만들겠다고 용을 쓰며 아이를 그 패턴에 끼워 맞추려고 했고, 아이가 좀 커서는 8시에는 재워야 한다고 정해놓고는 하루 일과를 모두 그 틀에 맞춰 돌아가게 하려고 남편과 내 자신을 달달 볶았어. 내가 정해놓은 일정이나 기준에서 하나라도 어긋나면 잔소리를 하고, 인상을 쓰기 일쑤였고. 아이를 낳고 한 2년간 남편이랑 지긋지긋하게 싸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 그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


언니, 통제 성향이 강한 아이와 엄마가 만나면 어떨지 상상이 돼?

 번은 우주가 집에 있는 색연필과 사인펜을 몽땅 꺼내서 ‘알록달록 전구라고 상상하며 벽에 붙이고 싶어 하는 거야. 나는 옆에 앉아서 테이프를 뜯어주었는데, 우주가 계속 색연필을 너무 벽면 아래쪽에 붙이더라고. 그냥 아이가 하는 대로 두면  것을, 나는 조금  위에 붙이면 예쁘지 않을까?’라고 훈수를  거야. 아이는 아니라며 자기 방식을 고수했는데 계속 지켜보는  눈에 그것들의 간격과 높이가 자꾸 거슬리는 거지. 결국 내가  번째로 ‘이건 조금 위에 달까?’라고 말을 했을  우주는 결국 폭발해버리고 말았어. 벽에 붙인   떼겠다고 화를 내는 아이에게 ‘엄마는 그냥 엄마 생각을 말한 것뿐이야.’라고 말했더니 우주는 ‘엄마는 생각하지 !’라고  소리를 지르며 이렇게 덧붙였어. 엄마는 맨날 엄마 하고 싶은 대로만 !”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어. 우주가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지 우주의  한마디에 비로소 깨닫게  거야. 내가 아닌 척하면서 계속 아이를  뜻대로 하려고 해왔었구나, 하고. 우주 입장에서 엄마는  엄마 마음대로 하는 엄마였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미안하던지. 어쩌면 우주의 통제 성향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어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늘 언니에게 소개하고 싶은 책은 바로 ‘통제’와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를 위한 그림책이야.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이라는 책인데, 뭐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안심이 되고 내가 생각하는 틀에 모든 걸 맞추려고 발버둥 치던 내 스스로를 조금 내려놓는 계기가 되어준 아주 고마운 책이야.

책 내용은 이래.

앙통의 수박밭은 완벽했다.

누군가 수박 한 통을 훔쳐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앙통은 그 빈자리를 볼 때마다 수박밭 절반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앙통의 수박밭에서 수박 하나가 없어져. 가지런히 열 맞춰 있는 수박들 사이의 빈자리는 누가 봐도 눈에 띄어. 사라진 수박의 빈자리는 앙통의 슬픔으로 가득 차고, 앙통은 그 수박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심지어 악몽에 시달리기까지 하지. 앙통은 너무 괴로워서 사라진 수박을 잊고 싶은데, 도저히 되지가 않아. 결국 앙통은 밤새 수박밭을 지키기로 하는데 그만 까무룩 잠이 들고, 그 사이 앙통의 수박밭에는 밤을 ‘완벽하게’ 즐길 줄 아는 고양이들이 나타나는 거야!

고양이들이 밤새 벌인 파티로 수박밭은 난장판이 되어 버리는데 신기하게도 수박은 전보다 더 싱그러워 보이고, 사방으로 이리저리 흩어진 수박들 사이에서 없어진 수박의 자리는 더 이상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돼.

앞으로 돌아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나란히 줄 서있던 수박밭 그림을 보고, 무질서하게 나뒹구는 수박밭을 다시 한번 보는데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어. 끝도 없이 규칙적으로 늘어선 수박밭을 볼 때 마음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사라지고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았어. 그동안 나는 내가 정해둔 규칙과 틀에 매여 스스로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구나. 나뿐만 아니라 아이도, 남편도 많이 답답하고 힘들었겠구나.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도 많은 규칙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 걸까. 그림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난 내 머릿속에 촘촘하고 팽팽하게 짜인 어떤 실들이 툭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어.

물론 이 그림책 한 권으로 모든 게 바뀌진 않았지만 확실히 이 책 덕분에 나는 꽤 많이 느슨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 매일 밤, 아이 장난감으로 어질러진 거실을 더 이상 치우지 않게 되었고 하루 두 번, 세 번 하던 바닥 청소도 건너뛰는 날이 많아졌거든. (나에게 이건 아주 큰 결심이 필요한 종류의 일이야.) 게다가 가끔 우주의 알 수 없는 고집에 그냥 하하하. 웃어버리는 여유가 생기기도 했어. 밤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고양이들처럼, 그냥, 아무렴 뭐 어때, 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조금 자라난 거야.




모든 게 제 맘대로 안 되면 화가 나는 우주에게 이 책이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아이와 함께 봤는데, 역시 아직은 어려운 것 같기는 해. 글도, 그림도 아이보다는 오히려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에 가깝달까.

그래도 이 책을 우주와 함께 보면서 앙통에 대해, 없어진 수박과 고양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곤 해. 아직은 내가 하는 말을 제 생각인 양 그대로 따라 할 뿐이긴 하지만 분명 우주의 마음에서도 뭔가가 조금은 자라나지 않을까 기대해봐.

다른 이야기 하느라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못했는데, 이 책, 앙통의 마음을 표현한 방식이나 그림의 색감, 전체적인 구성이 정말 ‘완벽’하게 느껴질 정도로 좋아. ‘앙통’이란 이름에서 알아챘겠지만, 프랑스 작가의 책이기도 해. 우리나라에선 예전에 한 번 출간되었다가 절판되고, 지난해에 다른 출판사에서 작가와 직접 계약을 맺어 재출간한 거래. 평이 꽤 좋아서 출간되고 난 후 여러 곳에서 이 책이 소개되었는데, 프랑스에서도 많이 알려진 책인지 궁금하다. 언니가 도서관에서 쉽게 구해볼 수 있으면 좋겠어.


언니도 하루 종일 아이들과 복작복작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오늘은 내 하소연이 너무 길었네. 그래도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나는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어.

혹시 언니도 ‘완벽’에 대한 강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오늘만큼은 ‘아무렴 어때’ 마음으로 가벼운 시간 보내길 바랄게.



22.01.19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는 언니의 2022년을 응원하며,

다경



P.S

나, 언니 편지 읽고 바로 <벗지 말 걸 그랬어>를 구해봤어. 혼자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그 그림책의 유머를 이해하기에 우주는 아직 어린 것 같기는 하지만,

가끔 옷을 입다 만 채로 또는 자석 블록을 손목에 낀 채로 나에게 와서는 그래.

“나는 이대로 어른이 되는 걸까?”



글 : 코린 로브라 비탈리

그림 : 마리옹 뒤발

역 : 이하나


그림책공작소|2021년

원제 : Le Champ D'Amour D'Anton


#완벽 #강박 #질서 #내려놓기 #자아성찰 #어른을_위한_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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