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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May 04. 2022

05. 지금 이 순간, 여행이 그립다면

그림책 <노란 풍선의 세계여행>

언니!

언니도 알겠지만 한국은 지난 주말부터 설날 연휴였어. 연휴 전부터 마음이 바빠서 언니 편지를 받아놓고도 한 글자를 쓰지 못했네. 근데 나 설날 연휴 내내 언니에게 편지를 썼어. 전을 부치면서, 설거지를 하면서, 사과를 깎으면서, 행주를 빨면서 계속 머릿속으로 언니에게 편지를 썼어. 준호가 직접 쓴 <오싹오싹 당근>의 이야기를 상상해보고, 언니가 준호에게 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상기되었을 순간들과 눈을 반짝이며 언니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준호의 발그레한 뺨을 떠올렸어. 그리곤 ‘엄마’가 아닌 ‘나’란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데 문득 몇 년 전 가족여행이 생각났어.




결혼 3-4년 차였을 때 시가 가족들 모두와 필리핀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거든. 그때 시가 가족들이랑 부쩍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 뭐랄까, 결혼하고 처음으로 그냥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결혼을 하고 가족이 되긴 했지만 다 같이 모이는 때라고는 명절이나 김장, 어머니 생신 정도가 전부니까, 오랜만에 만나도 며느리인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부엌에서 보내는 게 다반사잖아. 나는 그저 음식을 만들고, 나르고, 치우는 게 다인 사람이었는데(내가 느끼기에) 여행을 가선 그럴 일이 없는 거야.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많은 순간 가족들의 가이드 역할을 해야 했는데 그건 며느리로서가 아니라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을 많이 다녀본 나란 사람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었어. 나는 그게 참 좋더라고. 이거 봐요. 전 이렇게 여행을 다녔어요. 여행할 때 전 이렇게 자유롭고 씩씩하답니다. 이게 저예요. 그렇게 나는 온몸으로 말했던 것 같아.  

낯선 여행지에 가면 새로운 분위기에 취해 아주 많이 들뜨곤 하는데 가족여행 내내 나는 한껏 들뜬상태로, 어떤 의무에도 짓눌리지 않고 그냥 나로서 가족들이랑 함께 시간을 보냈어. 어떤 역할의 가면도 쓰지 않은 채, 그냥 내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겁게 닫혀있던 마음의 빗장이 확 열리는 걸 그때 경험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우리가 ‘며느리’나 ‘시누이’나 ‘아주버니’ 같은 이름표 말고 서로의 이름을 가지고 만났다면 서로가 갖고 있는 것을 더 잘 볼 수 있었겠다. 그래서 어쩌면 서로를 더 많이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


나는 친정 엄마를 ‘엄마’가 아닌 한 여성, 한 사람으로 인식할 때까지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어. 아이를 갖고 나서야 엄마를 나와 비슷한 여성으로 바라보게 된 것 같아. 엄마는 그냥 항상 ‘엄마’였는데, 내가 엄마가 되면서 엄마 역시 ‘엄마’ 이전의 삶이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야. 그 후부터 엄마를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어. ‘엄마’라는 이름이 가리고 있었던 엄마의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 한때 전국 곳곳을 누비며 여행을 다녔다는 엄마의 젊은 시절을 가늠해볼 수 있게 된 거야.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엄마를 바라보게 된 후로 나는 엄마를 한 사람으로서 더 많이 애정 하고, 존경하게 된 것 같아. 


그래서 나도 가끔 우주에게 나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해. 언니가 준호에게 언니가 영화 만들던 사람이란 이야기를 해준 것처럼 지금 우주가 보고 있는 ‘엄마’인 나의 모습 말고 나의 다른 모습을 알려주고 싶어서 말이야. 근데 나는 나의 일 이야기보다는 여행 다닐 때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되더라. 그때가 가장 행복하기도 했고 지금 가장 그리운 게 여행이기도 해서 말이야. 어쩌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인지도 몰라.

아무튼 우주에게 여행 다닐 때 이야기를 엄청난 허풍을 섞어서 들려줬더니 처음엔 여행 이야기 자체를 흥미로워하다가 나중엔 ‘우주는 어디 있었어요’라고 묻고 그다음엔 ‘우주도 거기에 갈래요’라고 하는 거야. 우주의 그 말에 내가 얼마나 설레었는지 알아? 우주에게 ‘다음에 꼭 같이 가자’고 약속을 하면서 우주가 조금 더 커서 함께 배낭여행을 하는 상상을 해봤어. 아이랑 떠나는 여행은 어떨까. 하고. 아이랑 하는 여행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자기 몫의 배낭을 메고 나와 함께 지도를 더듬거릴 우주의 빛나는 얼굴을 떠올려보면 왠지 즐거워져. 똑같은 여행자가 되어서 함께 새로운 길을 걷는 거잖아. 분명 재밌는 일이 많을 거야. 그렇지? (그렇다고 해줘!)




언니, 내가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좋아하는 것을 나누는 것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를 엄청 좋아했었던 어린 나와 우주에 대해서 이야기해야지,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여행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른 그림책이 생각나버렸어. 그래, 아무래도 이번엔 그냥 여행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어.  

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책은 바로 <노란 풍선의 세계 여행>이라는 그림책이야. 집 안에서도 여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그림책이라면 믿겠어? 정말 보는 내내 심장이 콩닥콩닥, 엉덩이가 씰룩씰룩했다니까. 책을 좋아하는 친구 덕에 우주가 태어나고 난 후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책들을 물려받고 있는데, 친구가 보내준 책들 중에서 발견한 책이야. 책을 물려받다 보니 어떤 것들이 집에 있는지 미처 알지 못할 때가 많거든. 그래서 가끔 너무 좋은 책을 발견하면 보물이라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 책이 딱 그랬어.


짠! 이게 첫 장을 넘기면 보이는 그림이야. 멋지지? 난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바로 이 책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 보여? 빗자루를 탄 마녀들, 노래하는 아기 천사들, 외계인이 탄 우주선, 열기구, 저 멀리 보이는 집과 사람들 그리고 구름 사이로 날아가는 노란 풍선. 

현실과 상상, 시간과 공간이 모두 뒤섞인 것 같은 이 그림을 보는 데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처럼 설레는 거야. 비행기가 뜨고 내가 발 딛고 서있던 땅이 점점 멀어지면서 사람과 건물들이 미니어처 장난감처럼 작아지는 걸 바라보는 그 순간이 나는 가장 설레거든. 현실을 벗어나서 내가 모르는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 같아서 말이야. 이 첫 그림이 나한테는 그렇게 느껴졌어. 

우주랑 ‘와! 이거 봐, 마녀야! 어? 이 새는 입에 뭘 물고 가는 거지? 어! 노란 풍선이 여기 있어!’ 하면서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글쎄, 글도 없는 이 그림책을 한 시간 가까이 봤다니까. 


이 책 안에는 북적이는 도시, 사막의 오아시스 마을, 해적들이 싸우는 바다, 바닷가 휴양지, 아프리카 초원, 마녀들의 마을, 판잣집이 즐비한 가난한 마을 등 다양한 장소가 등장해. 어떤 곳은 현실에 존재하는 곳처럼 보이고 어떤 곳은 상상 속 이야기에 존재하는 곳처럼 보이는데 그것들이 오묘하게 섞여 있는 곳도 있고, 장소마다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도시에선 불이 나고, 도로 한 곳에는 토마토를 잔뜩 실은 트럭이 넘어져서 토마토가 모두 쏟아져있기도 하고, 어떤 죄수가 감옥을 탈출하기도 해. 재미있는 건 그것들이 다음에 나오는 다른 장소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거야. 아마도 트럭이 토마토를 실었을 농장이 시골 마을에서 보이기도 하고, 감옥을 탈출한 죄수가 어디론가 계속 가고 있는 모습이 나와. 처음엔 그냥 노란 풍선을 찾는 숨은 그림 찾기 책인 줄 알았는데, 노란 풍선 말고도 그림마다 숨겨져 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해서 그것들을 발견하는 재미,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해. 

어떤 페이지에선 ‘우주야, 엄마 여기 가봤어!’하면서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어떤 페이지에선 ‘우주야, 여기는 엄마가 진짜 항상 가보고 싶었던 곳이야. 우리 나중에 여기 같이 갈까?’ 하기도 하고. 또 어떤 페이지에선 빈민촌처럼 보이는 이 마을을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주춤하기도 하고, 어떤 페이지에선 나무를 더 많이 베면 이 마을이 사라져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우주는 노란 풍선을 찾는 것도 재미있어하고 무엇보다 곳곳에 보이는 사고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잔뜩 흥분해서 ‘이거 봐요!’라고 소리를 질러댔어. 여기 불이 났어요, 여기 비행기가 떨어졌어요, 하면서. 그러다가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도 하고, 자기가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하고. 그렇게 한참을 우주랑 그림들을 눈으로, 손으로 쫓아가며 이 책을 봤어. 




보다 보면 동화나 영화 속 주인공이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는데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도 정말 재밌어. 아직은 우주가 모르는 것들이 많아서 다 이야기할 순 없었지만 우주가 커가면서 그것들을 알게 되면 스스로 발견하는 날이 오겠지?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꽤 오랫동안 함께 볼 수 있을 책인 것 같아. 볼 때마다 새로운 장면을 발견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거든. 다른 나라의 지리나 문화 같은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는 여지도 아주 많고 말이야.


이 책을 처음 본 날 밤, 마치 내가 세계 여행을 한 것처럼 가슴이 벅찼던 기억이 나. 

언니, 나는 자주 여행을 꿈꿔. 우주와 함께 세렝게티 초원에 가고 싶은 날은 아이와 그곳에 가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찾아보고, 뉴질랜드 남섬과 북섬을 카라반을 끌고 여행을 하려면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 지 검색해봐. 또 어떤 날은 우주가 더 커서 혼자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봐. 우주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크면 좋겠단 생각을 하면서 여행을 떠나는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줄지 고민해보고, 내가 처음 배낭여행을 간다고 나섰을 때 엄마는 많이 걱정되었을까, 그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해. 또 어떤 날은 60이 돼서 남편과 단 둘이 다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상상해봐. 그때도 우리는 티격태격하려나, 하면서. 아, 언니가 있는 프랑스에도 가고 싶어!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준호랑 리아랑 우주랑 셋이 노는 동안 우린 맛있는 커피에 빵을 즐기면서 맘껏 수다를 떨면 좋겠다. 


아아.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우리의 일상을 붙잡고 안 떨어질 줄은 정말 몰랐는데. 내년엔 조금 더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다닐 수 있으려나. 


그래도 언니, 편지를 쓰는 동안 또 한 번 여행 생각에 즐거워졌어, 난. 편지를 쓰느라 이 책의 정보를 더 찾아보다가 <따라와 볼래?>라는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바로 주문했어. 당장 어디론가 떠나긴 쉽지 않지만 언니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계속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느낌이야. 내가 몰랐던 그림책들을 새롭게 알게 되고, 내가 몰랐던 언니의 세계를 조금씩 발견하는 게 참 좋아. 정말 즐거운 22년이야. 

나도 언니에게 고마워!



22.02.04

언니네 집 정원에서 커피를 마실 날을 상상하며,

다경


저자 : 샤를로테 데마톤스


마루벌, 2005년

원제 : De gele bal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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