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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아무르 Jul 07. 2022

14. 아이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그림책 <에밀, 장례식에 참석하다>

다경아,


네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어. 나는 나다운 모습이나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사교적이지 않은 내가 사교적이려고 애쓰는 상황에서도 그랬어. 그게 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세상이 원하는 모습에 나를 맞추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게 너무 괴로웠어. 내 모습을 부정하며 살아야 했으니까. 그런 이유로 네 편지를 읽으며 스스로에게 질문해본 것 같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면, 그건 어떤 이유에서 일까, 하지 않는다면 왜 일까. 정말로 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없을까. 그리고선 네 편지를 두세 번 다시 읽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 질문이 내게는 다른 형태로 나타났던 것 같다! 


혹시 20자 내로 자기소개를 써 본 적 있어? 20자는 의외로 짧아서 자신을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아 효율적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정말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 아이들에게 20자 이내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한다면 뭐라고 할까? 먼저 이름부터 말하겠지?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이런 말을 썼대. 


“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


나는 한 때 나를 정의하는 말에 많이 집착했었어. 특히 역할로 나를 정의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나라는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 것보다 왜 사는 것인지가 더 궁금한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 같아. 사는 이유를 찾다 보니까 세상에 기여를 하든, 흔적을 남기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렇게 꿈을 정하고 열심히 달렸어. 처음엔 영화감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싶었고, 다음엔 영화학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싶었어. 어쨌든 예술이라는 매체로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나는 예술의 힘을 믿었거든. 그러다가 엄마가 되었지. 내가 원하던 이름이 사라지고 생각지도 않은 이름이 내게 붙어버렸어. 엄마, 주부. 나는 한동안 나의 새 이름을 부정했어. 부정하는 동안은 참 힘들었어. 남편과 아이 때문에 내가 지워지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다가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정말로 엄마와 주부가 되기 싫었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다른 이름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주부가 된 건 나의 관심이 이동해서 그런 건 아닐까? 거의 15년 동안 바라보던 이름에 대한 관심이 새로운 이름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아. 아무도 내게 엄마나 주부가 되라고 강요한 것은 아닌데. 나의 본능이 자연스레 영화 대신 아이를 선택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게 아이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니잖아. 아이는 내게 강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걸. 선택은 모두 내가 했는걸. 그걸 인정하고 나니 이름에 대한 집착이 많이 사라졌어. 한동안 엄마, 주부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아이들이 조금 자라자 이름에 대한 의문이 다시 떠올랐어. 이제 엄마라는 역할이 내 일상을 송두리째 점령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나는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어떤 이름을 찾아야 하지? 하지만 알 수가 없었어. 정말 알 수가 없었어. 이것저것 여러 이름을 기웃거리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셰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이름이 나를 정의하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 나를 정의하는 것은 삶을 향한 나의 태도야. 예민하지만 다정하고 미지의 영역을 받아들일 여유가 있는 열린 사람이고 싶어. 사람의 마음은 꺼내 놓은 점토와 같아서 나이가 들 수록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아. 말랑말랑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 주물러 주는 것이지! 이미 알고 있던 것, 하던 것에 머무르지 않는 호기심 많은 사람, 세상에 작게나마 기여하는 사람, 아니 더 거창할 필요도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사람, 나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고 나만의 고유한 색을 갖기 위해 다양한 자극을 만나고 배우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 나는 이제 나를 ‘계속 구르기는 하는데 정확히 뭐하는지 모르겠는 사람’이라고 소개해. 룰루랄라 재밌게 살 거야. 도통 뭐하는지 모르겠는 사람으로. 


아참! 지난 편지에 내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거라고 했는데 삶에 대해 이렇게 신나게 떠들었네. 우주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어? 너에게 죽음은 어떤 영역이야? 나는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할 시간을 따로 가져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죽음은 왠지 나에게는 먼 이야기 같고, 미지의 영역 같아. 가까운 사람이 먼 길을 떠나긴 했지만, 슬프고 아련한 감정만 있을 뿐, 내게 누군가 죽음에 대해 물으면 이렇다 할 이야기는 못 할 것 같아. 그런 나에게 준호가 어느 날 물었어. 


“엄마 사람은 왜 늙어? 꼭 늙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


너는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 내 대답을 너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나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야. 이걸 꼭 알아줘. 내 대답을 들은 남편이 나보고 너무 현실적인 대답을 해서 아이가 트라우마 생기겠다고 했거든. 허허. 자, 내 대답은 이거였어.


“모든 것에는 끝이 있어. 양말도 신다 보면은 낡아서 구멍이 나고 결국엔 못 신게 되는 날이 오잖아. 사람 몸도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고 그러다 못 쓰게 되고. 왜? 너는 늙기 싫어?”

“응. 나는 늙기 싫어.”

“왜?”

“늙으면 하늘나라 가야 하잖아.”

“하늘나라 가는 게 왜 싫은데?”

“엄마 아빠랑 떨어져야 하니까. 리아도.”

“괜찮아. 그건 아주아주 나중일이야.”

“얼마나 나중?”

“몰라? 어쨌든 하늘나라 가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어.”

“근데 엄마를 기다려야 하잖아. 오래 기다려야 되면 어떡해?”

“괜찮아. 너보단 엄마가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까.”

“얼마나 먼저?”

“그건 모르지. 아무튼 우리는 만날 거야.”

“싫어. 엄청 오래 기다려야 돼.”

“근데 왜 하늘나라 가는 생각을 해?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지금 같이 있는 시간 동안 즐겁게 지낼 생각을 하자.”


그리고 준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어. 하지만 표정이 묘했어. 내 말에 납득했다기보다는 체념하는 느낌이었어. 아마 내가 아이의 불안을 보듬어주지 않고 너무 현실적으로 죽음에 대한 궁금증만 어설프게 풀어주려고 했기 때문이겠지. 이후에도 준호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했어. 엄마 아빠가 늙는 것이 싫다고 우는 아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안 죽는다는 말도 안 되는 약속도 하고, 죽어도 다시 나비가 되어 나타날 테니, ‘준호야!’하고 부르는 나비를 보면 꼭 잡으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했어. 그러다가 죽음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아이의 불안을 보듬어주는데 집중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 불안이 높은 아이들은 불확실한 것들을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그럴 때는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불안을 감싸주는 것이 중요하대. 사실 불확실한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아이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준호가 엄마 아빠를 많이 사랑해서 그런 걱정을 하는구나.”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대. 나도 그렇게 해봤는데 아이의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지는 것 같았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푸욱 안겨오더라고.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겪으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죽음에 관한 책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어. 정말 이상하지? 감정, 사회성 혹은 아기의 탄생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렇게 책을 찾아보았으면서 왜 죽음에 대한 책은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마 은연중에 죽음은 아이들의 성장에 필요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저 내 아이가 조금 더 예민해서 그런 생각을 했나 보다 정도로 가볍게 지나간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았어. 아니면 죽음이라는 주제가 너무 무거우면서도 동시에 비현실적이기도 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다가 우연히 <에밀, 장례식에 참석하다>라는 책을 보게 되었지. 정말 놀랐어. 아이들 책에서 죽음을 이야기한다고? 그것도 시니컬한 에밀이? 나는 당장 그 책을 빌렸어. 


오늘, 에밀은 장례식에 갈 것이다.


시작은 에밀 시리즈답게 단순해. 에밀은 장례식에 갈 거야. 그림에도 글에도 그 어떤 감정표현은 없어. 사실만 이야기하고 있지. 나는 작가가 죽음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 너무 궁금했어. 정말 민감한 소재잖아. 특히 아이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라면 더욱더 말이야.


오른쪽 : 에밀을 초대한 건 바로 에밀의 친구이다. 에밀의 친구는 장례식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친구는 에밀에게 함께 가자고 이야기했다.
왼쪽 : 장례식은 좋은 것이다. 장례식에 가면, 사람들은 슬픈 모습을 한다. 때로는 울기도 한다.


여기에는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어. 친구는 장례식을 좋아하지. 에밀도 장례식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 반면 장례식에 있는 사람들은 슬퍼. 울기도 하고 말이야. 이거 참 애매하지 않아? 사람들이 슬퍼하고 울지만 어쨌든 좋은 것이라는 것. 그렇다면 울고 슬퍼하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까?


오른쪽 : “어디를 간다고? 장례식? 아니, 정신이 있는 거야! 그리고, 누구 장례식에 가고 싶은 건데?”
왼쪽 : 어떤 아주머니의 장례식에 간다. 에밀은 어떤 아주머니의 장례식에 갈 것이다. 나이 든 아주머니 말이다.


엄마의 반응은 예상 가능한 범위에 있어. 장례식이란 매우 개인적이고 슬픈 것이지. 아이가 접하기에는 어려운 것이기도 하고. 아마 준호가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간다면 나라도 그럴 거야. 


오른쪽 :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아, 에밀 데리러 오셨어요? 산책하시려고요? 묘지에 가신다고요? 음… 공원이 더 낫지 않을까요?
왼쪽 : 음… 알겠습니다, 그런데 5시 전까지는 집에 데려다주세요. 안녕히 가세요 아주머니… 잘 다녀와 에밀… 좋은 장례식… 아, 아니 좋은 하루 보내!”

엄마는 안절부절못하는데, 에밀과 친구는 영 시니컬한 얼굴이지? 나는 이 대조가 참 좋았어. 작가는 죽음에 대해 예상 가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대표인 엄마를 당황한 모습으로 묘사해. 죽음을 진지하게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심각할 일이냐고 농담을 건네지. 나는 작가의 이런 가벼운 태도가 좋더라고.


오른쪽 : 에밀은 검은색 스웨터를 입었다. 검은색 스웨터는 좋다.
왼쪽 : 검은색 스웨터는 슬퍼하기 위해 입는 것이다. 슬퍼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아까 에밀이 “장례식은 좋은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 기억나? 여기서도 장례식의 특징을 이야기하면서 ‘좋은 것이다.’라는 단순한 표현을 써. 아이들에게 죽음이나 장례식의 논리를 설명하려 애쓰지 않지. 아이들이 ‘좋다, 싫다’라고 단순하게 자신의 취향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작가도 단순한 입장을 취해. 구구절절하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고 장례식은 왜 하는 것인지 설명하는 것보다 단순하게 장례식의 특징을 설명하고 그것은 좋은 것 (나는 이 말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어)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더라고.


오른쪽 :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마리 아멜리 루시엔 바쉐 (프랑스어로 소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는 성)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왼쪽 : 처녀 때의 성은 무똥 (프랑스어로 양이라는 뜻도 있는 성)이었고 나중에 남편을 잃었지요. 그녀가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부님이 이렇게 장례식을 진행하는 동안 에밀의 친구는 에밀에게 장난을 걸어. 바쉐 (소치는 사람)이라는 성이 나오면 음메라고 속삭이고, 무똥 (양)이라는 성이 나오면 메에에에에 라고 속삭이지. 매번 이름이 나올 때마다 장난을 하니 에밀은 그게 너무 재밌어. 에밀은 죽은 사람의 관에 장미꽃까지 선사하고 장례식을 나와.


에밀은 정말 멋진 장례식이라고 생각했다. 정말이다! 진짜 멋진 장례식이었다!


이렇게 신나는 발걸음으로 말이지. 집에 도착해서 엄마가 어떤 말을 했을지, 에밀과 친구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지? 엄마는 예상 가능한 질문을 했고 에밀과 친구는 그들 다운 반응을 했어. 마지막까지 위트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 


나는 사람이 좀 재미가 없거든? 뭐든 너무 진지하고 이성적인 경향이 있어. 그래서 반대로 이런 작품을 좋아해. 그런 태도를 조금이라도 닮고 싶거든. 준호도 너무 진지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 필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웃음 한 조각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에밀 시리즈는 소개해주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에밀은 투명인간>이라는 책은 박장대소를 하며 읽었는데, 진짜 싫은데 부모님이 시켜서 억지로 해야 하는 일들이 있잖아. 씻기, 양치, 잠자기, 야채 먹기 등등등. 그런 일들이 싫어서 스스로 투명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야. 자기는 완벽하게 투명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자꾸 자기를 발견하니까 완벽한 투명인간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에밀의 이야기야. 아! 다 소개해주고 싶다! 하지만, 다음엔 다른 책 이야기를 해볼게. 


2022.7.7

우주와 너에게도 웃음 조각 가득한 나날이길,

민영




글 : 방썽 퀴베이에 Vincent Cuvellier

그림 : 호넝 바델 Ronan Badel


갈리마르 쥬네스 지불레 Gallimard Jeunesse Giboulées | 2014


#장례식 #죽음 #우정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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