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여우 나무>
언니,
나는 언니가 소개해 준 <에밀, 장례식에 참석하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단숨에 언니 글을 읽어내려갔어. 장례식이 좋다고 표현하는 것도, 슬퍼하기 위해 검은색 스웨터를 입는다는 표현도, 슬픈 것은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까지 모두 흥미로웠어. 무거운 것을 너무 무겁게 이야기하면 너무 깊이 가라앉아버릴 텐데 이렇게 죽음과 장례식이라는 소재를 자연스럽게, 단순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방식이 참 좋은 것 같아.
그런데 말이야, 분명 생각은 그렇게 하는데, 막상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그 말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무거워지고 말아.
한 달 정도 전에 우주가 갑자기 물고기를 키우고 싶다고 하도 보채서 이웃한테 구피 몇 마리를 분양받아 왔어. 무언가를 키운다는 게 얼마나 큰 책임이 필요한 일인지 알기에 나는 가급적 새로운 생명을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아이의 간절한 바람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어. 급하게 마트에서 작은 어항을 사고, 어항에 넣을 돌과 장식물을 사 가지고 오는데 계속 불안했어. 한 번도 키워본 적 없는 물고기를 잘 키울 수 있을지, 물고기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전혀 없는데 자칫 잘못해서 물고기가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이 됐는지 몰라. 우주가 속상해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사실은 생명을 다한 물고기의 몸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강했어. 물 위에 물고기가 죽은 채 동동 떠있는 장면을 상상하면 너무 무서웠거든.
우리 집에는 유로, 해로, 순이, 이렇게 세 마리의 고양이가 있어. 유로는 2004년에 태어나 우연히 나와 함께 살게 된 삼색 고양이인데 열아홉 살이나 된 할머니야. 작년부터 부쩍 몸에 힘이 없어 보이더니 올해는 눈에 띄게 다리를 절뚝거리고, 몸은 비쩍 마르고, 털은 윤기가 하나도 없이 푸석푸석해졌어. 매력적으로 빛나던 에메랄드빛 눈동자도 많이 탁해졌고, 무엇보다 어디가 아프고 불편한지 새벽만 되면 집이 떠나갈 듯 우야아옹, 하고 불안한 목소리로 울어. 어떤 날은 화장실에 들어가 몇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고.
어쩌면 올해가 유로의 마지막 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올 초부터 계속하고 있어. 그래서 가끔 집에 와서 유로가 안 보이거나 꿈쩍하지 않고 누워있으면 가슴이 철렁해. 혹시, 혹시, 하고. 유로가 오랫동안 큰 탈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이제 편안하게 가는 길만 남았다고, 슬퍼할 것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날 마주하게 될 유로의 딱딱하게 굳은 몸을 상상하면 무섭고 슬퍼. 10년 전 갑작스럽게 내 곁을 떠난 나의 첫 반려묘 생각이 나면서 말이야.
그래서인지 물고기가 죽는 것을 상상만 해도 너무너무 싫더라고. 제발 우리 집에서, 내 눈앞에서 죽지는 마, 제발. 그런 심정, 언니는 이해돼? 최대한 죽음을 마주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그런 마음.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거야.
나는 물고기를 좋아하는 마음보다는 제발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덟 마리의 구피에게 조금 좁아 보이는 어항을 더 큰 어항으로 바꾸고, 전문 수족관에 가서 물고기한테 더 좋다는 천연 모래와 돌을 사 가지고 와서 깔고 어항 물을 깨끗하게 해 준다는 물 달팽이도 한 마리 입양했어. 그렇게 3주가 지나고 한 마리도 죽지 않고 잘 사는 것을 보고서야 불안함이 사라졌지.
근데 어느 날 집에 돌아와서 습관처럼 어항을 들여다보는데 꼬리가 가장 화려하고 몸집이 제일 컸던 구피 한 마리가 안 보이는 거야. 어디 숨어있나, 하고 어항 구석구석을 찾아보는데도 보이지 않았어. 며칠 전부터 배가 볼록하고 움직임이 이상하다 싶었던 녀석인데, 설마. 다급하게 우주를 불렀어.
“우주야! 구피 한 마리가 안 보여!”
방에서 제 아빠랑 놀고 있던 우주가 쪼르르 내 앞으로 달려와 말했어. 아주 해맑게.
“구피가 죽어서 아빠랑 같이 묻어줬어요!”
유치원에서 돌아와 보니 구피 한 마리가 죽어서 움직이지 않더래. 그래서 아파트 1층 화단에 묻어주고, 표지석도 세워두고 왔다고 하더라고.
“구피는 이제 아기로 다시 태어날 거야!”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언젠가부터 우주는 죽으면 다시 아기로 태어난다는 말을 해. 올봄에 우주한테 유로가 곧 우리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말을 했을 때도 “그래도 괜찮아. 죽으면 다시 아기로 태어나!”라고 하더라고.
우주도 죽으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 우주 앞에서 ‘죽는다’는 말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습관처럼 ‘배고파 죽겠다’, ‘죽는 줄 알았네’ 이런 말을 많이 쓰기도 하고 우주가 위험한 행동을 하려고 할 때 위험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잘못하면 죽기도 한다’는 말을 하게 되더라고. 그런 말들을 들어서 인지 어느 날엔가 죽으면 어떻게 되냐고 묻더라.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막연하게 아이가 ‘죽음’을 무섭고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죽으면 아기 천사들이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려가 준다’고 이야기를 해줬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에 끊임없이 ‘왜요’라고 묻는 우주에게 이런저런 설명들을 해주었는데 그 후로 우주는 특별히 ‘죽음’에 대해 묻지 않았어. 그런데 그 후로 어디서 들은 건지 ‘죽으면 다시 아기로 태어나는 거야’라는 말을 하는 거야.
언니에게 편지를 받고 우주한테 한 번 더 물어봤어.
“우주야, 우주는 죽는 게 뭔지 알아?”
잠깐 생각을 하던 우주가 또 그랬어. “음, 죽는 건 다시 태어나는 거야.”
“그렇구나. 그럼 엄마는, 죽으면 새로 다시 태어나야겠다.”
“왜요?”
“엄마는 새가 좋으니까. 가벼운 새로 태어나서 날아다니게.”
“그럼 우주는 엄마를 졸졸 쫓아다녀야겠다.”
내가 새가 되면 나를 쫓아다닐 거라며 웃는 우주랑 그렇게 대화를 하고 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어. 아마 우주는 아직 ‘죽음’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무서워할 만큼 그것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나이는 아닌 것 같아. 어쨌든 우주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죽음’에 대한 그림책을 찾아보니 의외로 많은 그림책이 있는 걸 알았어. 아이들과 죽음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죽음’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거니까 아이들 그림책에 ‘죽음’과 관련된 게 있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몰라. 많은 아이들이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죽음을 겪기도 하고, 키우던 식물이나 동물의 죽음을 겪기도 하고, 더 가까이는 비 내린 다음 날 길거리에서 말라죽어있는 지렁이를 마주하곤 하니까.
‘죽음’에 대해 아주 많은 종류의 그림책이 있었는데 나는 우주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그림책을 우주와 함께 보고 싶어서 이 책을 골랐어. 바로 <여우 나무>라는 그림책이야.
<여우 나무>는 여우의 죽음으로 시작해. 한 나이 많은 여우가 느릿느릿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숲 속 공터에 가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숲을 지그시 바라보고 땅에 누워. 그리고 눈을 감고 영원한 잠에 빠져들지.
여우의 죽음을 알게 된 친구들이 모두 공터로 모여들어. 부엉이, 다람쥐, 족제비, 곰과 사슴 그리고 새, 토끼와 생쥐까지 모두 와서 여우를 둘러싸. 가만히 누워있는 여우를 오래오래 말없이 바라보지. 그러다가 부엉이가 먼저 입을 열어. 여우와 아주 어렸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거야.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생각이 나. 가을이면 떨어지는 나뭇잎을 누가 많이 잡나 내기를 하곤 했지”
동물들은 그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고 그 후로 모두 차례차례 돌아가며 여우와의 추억을 이야기해. 언제나 숲 속 동물들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던 다정했던 여우를 떠올리며 모두 미소를 지어.
그렇게 동물들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여우가 누워있던 자리에서 작은 오렌지 나무 싹이 올라와. 오렌지 나무 싹은 동물들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점점 커서 작은 나무가 돼. 우주가 말한 것처럼 아기는 아니지만 죽은 여우는 오렌지 나무가 되어 다시 태어난 거야.
나는 이 그림책이 죽음에서 또 다른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숲 속 동물들이 여우의 죽음을 슬퍼하고, 여우를 추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참 좋았어. 여우에 대한 추억을 많이 떠올릴수록 무거웠던 동물들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는 표현도, 추억이 많아질수록 나무가 더 높이 자라고 아름다워졌다는 것도 참 좋더라.
하지만 언니, 죽음은 나에게는 여전히 무거운 것 같아. 어제 친한 친구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셨거든. 황망하게 떠난 친구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버지를 갑자기 잃은 충격과 슬픔에 빠져있을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친구 옆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미안하고 속상해서 어제는 하루 종일 눈물이 불쑥불쑥 터져 나와 힘든 하루를 보냈어.
연세가 일흔아홉인 나의 아빠는 얼마 전에 응급실에 다녀오셨고, 불과 몇 달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아빠와의 이별도 얼마 남지 않았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
죽음은 누구에게나, 미처 준비되지 않았을 때도 불쑥 찾아올 수 있다는 걸, 죽음은 우리 삶의 아주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라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초연해질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슬프고, 아프고, 후회되고, 속상하고, 미안하고, 외롭고, 그래서 또 두렵고.
<여우 나무>의 여우처럼 마지막에 좋아하는 곳에 몸을 뉘이고, 좋아하는 풍경을 눈에 그득 담은 후 잠자듯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사랑했던 이들이 나를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추억해주면서 내가 곁에 머무르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이게 참 힘들다는 걸 아니까 이미 커버린 우리들에게 죽음은 더 어렵고 무거운 건지도 모르겠어. 아닌가, 죽음이 절대 끝이 아니라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걸까. 우주가 죽은 구피를 묻어주고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 그게 끝이 아니라 ‘아기로 다시 태어난다’는 확신이 있어서였을까.
정말 잘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건 우리 삶과 죽음은 멀지 않다는 것, 그리고 잘 살면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을 거라는 것 정도가 아닐까.
오늘은 복잡한 생각들을 모두 다 정리하지 못한 채 그냥 편지를 마쳐야 할 것 같아.
밤이 깊었어.
2022년 7월 13일.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의 안녕을 바라며,
다경
글, 그림 : 브리타 테켄트럽
옮긴이 : 김서정
봄봄출판사 ┃2013
#죽음#생명#삶#추억#기억#장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