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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Jul 01. 2022

13. 나를 찾아 떠나는 기나긴 여정

그림책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코끼리 이야기>, <나는 누구예요?>

언니,     


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다운 것’이 뭔지 몰라 헤매며 불안해하던 나의 10대와 20대 시절이 떠올랐어. 에밀처럼 자기만의 확고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늘 동경하며 그들처럼 되고 싶었지만 나 역시 오랜 시간 내가 본래 가진 모습보다는 내가 원하는 모습이나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습에 나를 끼워 맞추느라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거든. 언니가 사교적인 사람이 되려고 애썼던 것처럼 말이야.      




스무 살, 내가 연극영화학과에 합격했을 때 얼마나 신났을지 언니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나는 연극영화학과에 들어간 것만으로 마치 꿈꾸던 영화감독이 된 것처럼 들뜨고 신이 났어. 금방이라도 멋진 영화를 찍고 영화감독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지. 그런데 처음의 신나고 설레는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어. 학교에 갔더니 반짝반짝 빛이 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영화를 하려는 여자’에게 요구되는 어떤 잣대가 나를 무겁게 짓눌렀거든.

지금 생각하면  웃긴데, 내가 대학교 1학년일 때만 해도 여자가 조연출이 아닌 다른 기술 스태프를 하는  이례적인 일이었어.  번은 내가 촬영보조 스태프를 하겠다고 했더니 어떤 술자리에서  선배가 그러는 거야. 무거운 촬영장비와 조명장비를 들어야 하는데   있겠냐고. 내가 제대로 못하면 정말  많이 먹을 거라고. 그런 식의 말도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촬영 보조를 하겠다는 나한테 걱정을 가장한 으름장을 놓는데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몰라. 하지만 나는 그게 부당한 말이라는  알면서도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웠고,  답을 찾는 대신 여자도 어떻게든   있다는  보여주고 싶어서 ‘남자처럼되려고 애썼어. 여자 동기들과 어울리기보다 남자 동기들이랑 어울리면서 그들처럼 말하고, 험한 말을 쓰고,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밤새 마시고, 무거운 장비도 있는 힘껏 들어 나르면서 말이야. 남자 선배들은  앞에서 자신들을 ‘이라 지칭하며 나를 ‘남자처럼대했지. 나는 내가 가진 여성성을 억지로 지운 채, ‘우리랑 같이 사우나 가야지라는 남자 학우들의 농담에 허허실실 웃으며 나한테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다니며 그게 나라고 생각했어. 그게 나한테 맞는 옷이라고 믿으면서. 부끄러운 고백을 덧붙이자면 그때 나는 ‘험한 영화판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화장을 하고, 살랑거리는 옷을 입고 다니는 영화 전공 여학우들은 ‘영화를   없는 부류 치부했지. 하하하! (너무 민망하니  웃을게.)




오늘 언니에게 소개할 그림책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코끼리 이야기>의 아기 코끼리도 그래. 아기 코끼리는 자기가 코끼리가 아니라고 믿으면서 코끼리 무리들이 지나가면 비웃었어. 코로 물을 뿜고 풀을 뜯는 코끼리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는 사실 코끼리가 아니라 다른 동물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아기 코끼리는 기린처럼 다리는 길진 않지만, 몇 걸음만으로도 멀리 갈 수 있는 자기가 기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아니면 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아기 코끼리도 사자처럼 용감하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우렁찼거든. 아니면 코뿔소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얼룩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문득 물웅덩이를 들여다본 아기 코끼리는 코끼리의 모습을 한 자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아.  



아기 코끼리는 그럴 리가 없다며 초원을 떠나고 사막을 지나 바다를 건너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도시에 가지. 그곳에서 코끼리는 서커스에 들어가서 열심히 접시 돌리기와 자전거 타기를 연습해.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아기 코끼리는 생각하지. 자기는 역시 코끼리가 아니라고, 초원의 어떤 코끼리도 자기처럼은 할 수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아기 코끼리에게는 점점 고난도의 재주넘기가 주어지고, 뜨거운 불이 붙은 링을 넘다 그만 목에 걸리고 말아.      

위기에 처한 아기 코끼리는 결국 자신의 긴 코를 이용해 물을 뿜어 불을 끄는데 그 때문에 천막 안은 물바다가 되고 말아. 그리고 그곳에서 아기 코끼리는 다시 한번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마주하게 되지. 처음 물웅덩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봤을 때 아기 코끼리는 자기가 코끼리라는 것을 부정했지만 두 번째로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봤을 때는 비로소 자기가 코끼리라는 것을 받아들여.

“넌 코끼리야. 사막과 바다를 건넌 용감한 코끼리!

오직 코끼리만이 코로 물을 뿜어 누군가를 구할 수 있지.”


그렇게 자기가 누구인지 깨달은 아기 코끼리는 초원으로 다시 돌아가 친구들과 달리기 시합도 하고 기다란 코로 풀을 뜯고 물을 뿜으며 살게 돼.

이 아기 코끼리처럼 가장 자기 다운 모습으로 살 때, 우리는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거겠지?     




그런데 언니,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주 많이 의식하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평가를 내릴지 항상 신경 쓰고 나의 말이나 행동이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거나 움츠러들 때가 참 많았어. 그러니 내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늘 쉽지 않았지. 남과 나를 비교하며 부족한 내 모습을 못 마땅해 한 시간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물론 나이가 들어가며 이제는 그런 것들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지긴 했지만 그런 성향 자체가 아예 없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어려서는 그 자체가 나한테 늘 긴장감과 함께 스트레스를 주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는 거야. 그런 내 모습마저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달까.

그런데 그런 나를 닮은 건지, 우주도 그래.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긴장을 하지. 아주 어려서부터 그랬어. 분명 멋모르고 철없는 아기가 분명한데, 낯선 상황에 처하거나 낯선 사람들 앞에 가면 가만히 주변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거야. 집에서는 세상 둘도 없는 장난꾸러기에 막무가내 떼쟁이인데 밖에 나가면 절대 그러지 않았어.

유치원에서도 그래. 나는 우주가 그냥 뭐든 즐겁고 재미있게, 편하게 했으면 좋겠는데 사진 속 우주는 항상 긴장된 모습으로 얼어있어. 다른 아이들은 마냥 해맑은 얼굴로 즐기는 모습인데 사진 속 우주의 얼굴은 대부분 굳어 있어. 우주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뭐든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이 많은 아이라서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남들 신경 쓰느라 주춤하고 움츠러들었던 나의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그냥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가 느끼는 대로 편하게 행동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이 자꾸 드는 거야.


그러니까 이 책은 우주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편하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에, 우주에게 조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 골랐던 책인데 이 책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 아기 코끼리만큼 방황의 시간을 거쳐야만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 아닐까, 자기를 부정하고 미워한 시간 끝에 비로소 진정한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어쩌면 나도 어렸을 때 나한테 맞지 않는 옷을 수도 없이 입어보는 시간을 거쳤기 때문에 지금은 그나마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아 입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아기코끼리가 자기를 부정하며 헤매던 시간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 의례인 거지, 절대 어리석고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란 생각이 드는 거야.




그런데 언니, 도대체 ‘나’란 어떤 존재인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자기답다’는 것, ‘나답다’는 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나’를 정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40대에 접어든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게 참 어려워. 어떨 땐 알 것 같다가 또 어느 순간, 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 동서남북도 알 수 없는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작은 조각배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아.


언니에게 두 번째로 소개할 그림책 <나는 누구예요?>는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한 아이의 이야기야. 윌리엄은 요즘 생각할 게 너무 많아. 도대체 ‘나’란 누구인지 모르겠거든. 윌리엄은 그 생각을 하느라고 먹고 싶지도, 놀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아.     

주변의 어른들에게 ‘나는 누구예요?’ 하고 물어보지만 어른들이 해주는 대답은 충분하지가 않아. 엄마는 윌리엄이 엄마의 꿈이 이루어진 거라고 하는데 윌리엄은 그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고, 아빠는 ‘너는 너고, 아빠는 아빠고. 다 그런 거란다’라고 말하는데, 아무래도 아빠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아. 할아버지는 쿵쿵 뛰는 심장이 ‘나’라고 하고, 외할머니는 오히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묻지. 아무리 물어봐도 딱 맞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는 윌리엄은 이대로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할까 봐 걱정이 돼.

어쩌면 윌리엄이라는 이름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 줄지 몰라요. 그런데 세상에는 윌리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렇다면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 똑같은 건가요?


혼자서 생각할 게 너무 많아 나무집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는 윌리엄에게 할머니는 뭘 좀 먹으라고 하지만 윌리엄은 답을 찾을 때까지 나무집에서 안 내려갈 거라고 대답해. 그러자 할머니가 말하지.      


“그래? 그렇다면 그 위에 한동안 있어야겠구나.”     


나는 윌리엄을 보면서 중학생이던 내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어. 그때 즈음에 나는 나란 존재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했거든. 그때 나는 잘 이해도 되지 않는 철학책을 찾아 읽고, 심리학에 대해 배우면 ‘나’에 대해 알 수 있을까 싶어 심리학자를 꿈꾸기도 하고, 새벽까지 밤하늘의 별을 보다가 천문학자가 되어야겠다는 밑도 끝도 없는 꿈을 꾸기도 했어.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서 혈액형, 별자리, 사주, 애니어그램 같은 것에 의지해 나에 대해 알려고 부단히도 애썼지.(요즘은 MBTI에 빠져있어 ㅎㅎ) 나답고 싶은데 도대체 나다운 게 어떤 건지 몰라서 마음이 늘 흔들렸던 것 같아. 지금도 여전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보면 이건 그냥 평생의 숙제가 아닐까 싶어.      


이 그림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지막 장면을 소개할게.

“네가 누구인지 알 때까지는 안 내려오겠다고 했잖니. 그러니 나라도 올라와서 너랑 밤을 지내야지.”

“그러다 제가 답을 못 찾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조급해하지 마라. 시간이 말해 줄 거야.”     


밤이 늦도록 윌리엄이 나무집에서 내려오지 않자 할머니는 담요와 바구니를 가지고 나무집으로 올라와. 그러곤 윌리엄 옆에 누워 책을 읽지. 윌리엄은 할머니에게 물어.

“할머니는 할머니가 누구인지 궁금한 적 없어요?”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해.     


“알고 싶어 한다고 모두 알 수 있는 건 아니란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는 것도 있지.”     


그리고 또 말하지.      


“포기하지 말고 답을 찾으려무나. 언젠가는 알 수 있을 게다.”     


윌리엄은 애들은 원래 자기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놓이고 곧 잠이 들어. 할머니는 잠든 윌리엄 옆에서 한동안 밤하늘을 바라보며 잠들지 못하고.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할머니의 따뜻한 음성이 내 마음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아서 왠지 울컥했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잠들지 못하는 할머니의 아득한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또 울컥했어. 그리고 언젠가 우주가 자라서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끝도 없는 생각에 빠져드는 상상을 하며 또 한 번 코끝이 찡해졌어.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이만큼은 우리가 겪었던 힘든 과정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게 부모의 당연한 마음이지만 그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일 거라는 생각. 내가 아무리 나의 모든 경험과 삶에서 얻은 야트막한 지혜를 모으고 또 모아 우주에게 전해줘도 우주는 자기 몫의 방황과 실패와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 말이야.

아마 부모는 절대로 대신해줄 수 없는 아이의 방황과 고민의 시간들이 때로는 아이를 힘들게 하겠지만, 그 시간이 아이를 자라게 해 주는 걸 거야.      


앞으로 우주는 그리고 준호와 리아는 어떻게 커가게 될까? 어떤 모습으로, 어떤 고민을 하면서, 어떤 방황과 좌절을 겪으면서 어른이 되어갈까? 아이들이 어떤 시간을 보내든, 스스로에 대한 사랑만큼은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가장 편안한,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면 좋겠어.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마치 에밀이 그냥 ‘에밀다운’ 것처럼 말이야.



그나저나 언니, 나 에밀의 다음 이야기 너무 궁금해!! 이렇게 매력적인 아이가 주인공인 그림책이 왜 한국에는 소개되지 않은 거지?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당장 계약이라도 해서 출간을 하고 싶은 심정이야. 에밀의 다음 이야기, 빨리 들려줘!               



22.07.01

아직도 진정한 ‘나’를 찾고 있는 다경으로부터


글, 그림 : 지연리

대교북스 주니어┃2021


#자아정체성#자존감#여행#방황#코끼리

 

글 : 콘스탄케 외르벡 닐센, 그림 : 아킨 두자킨

옮긴이 : 정철우

분홍고래 ┃2021


#자아정체성#존재#질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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