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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휴 Nov 20. 2023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임유영 시집 『오믈렛』(문학동네, 2023)을 읽고

시속 화자가 글을 쓴 시인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은 해석이라고 배웠다. 이 시집에는 미술관이나 미술작품에 관한 시들이 많다. 역사전기비평적 차원에서 임유영 시인의 관심과 전공과 연관하여 해석하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임유영 시인의 『오믈렛』은 시 편마다 제각각 각도를 넓혀 부채꼴로 서사가 확장해 나갔다가 멀리 퍼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시를 읽고 있으면, 첫 문장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간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져 끝까지 읽게 된다. 『오믈렛』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을 보자. 



    

“일정한 속도, 일정한 보폭, 일정한 온도로 넓어지세요. 옮겨지세요. 퍼지세요. 멀리멀리 가보세요.” (「만사형통」) 같은 구절은 이 시집의 특성을 보여 준다. 또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데 목청이 좋은 장사꾼” 혹은 “발음이 또렷하고 독특한 성조를 넣어 사람들의 주의를 쉽게 끄는 사람” (「기계장치강아지」) 은 임유영 시인 자신을 표현한 문장이다.   


    

한 편 한 편 모두 짤막한 소설 같았다. 그 속에 사람이 있고, 배경이 있고, 서사가 있었다. 한 편의 시로 생각이 뻗어 나갔다. 다음 시 「처서」를 보자.  


    

“말을 해가며 몸짓을 해가며 침을 튀겨가며 진땀을 흘리며 폭소를 터뜨리며 산짐승처럼 너절한 잠자리에

들썩거리며 몸을 누이고 잘 때조차 뒤척인 죄로 자면서도 코곤 죄로 꿈에서도 말한 죄로 우린 말하지 않는 법을 잊어버리는 벌을 받고 있어요”


     

끝없이 쏟아지는 불평을 읽었다. 한 페이지를 꽉 채운 넋두리로도 모자라 마침표 하나 없는 문장을 끝으로 아직도 시인의 말들이 이어지고 있을 것 같다. (마침표 없는 시들 : 「부드러운 마음」, 「굴은 바다의 우유」, 「중국인 학자의 정원」, 「돌에서, 구역」, 「밤에」, 「처서」, 「우수」, 「채소 마스터 클래스」,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녹색병원」, 「미꾸라지와 뱀장어와 지렁이」)   



자꾸 이상한 것들을 본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돌에서 사람이 나왔다(「돌에서」), 감나무에 천사가 있었다(「정확한 죽음의 시각을 기록하기」), 아이의 뒷모습에서 죽을 징조를(「꿈 이야기」), 오백 살도 넘은 물뱀이(「미래로부터」), 돌아보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가네(「유형성숙」) 등”   

  


일반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시인의 존재는 무엇이고, 그의 영혼이 신계와 닿아있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죽음을 보기도 하고(「정확한 죽음의 시각을 기록하기」, 「부드러운 마음」 등), 심지어 자신이 죽는 이야기도 나온다.(「인테리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겁지 않게 바라보는 모습이 보인다. 시인이 실제로 누군가의 죽음을 보았거나, 꿈을 꾸었다.  


    

시에도 서사가 있어야 한다고, 구체성이 드러날수록 좋은 시라고 배웠다. 『오믈렛』에 담긴 구체성의 흔적들을 찾아보자.  

   


“가늘어진 과거와 팔짱 끼고 우래옥에 가서 냉면을 먹고 싶다. 찬 국수 먹는 동안 어두워지는 초저녁 하늘, 거기에 손거울 하나. 그 뒤편의 ‘아모레’.”(「사랑의 열매」) 

    


식당 이름까지, 손거울에 적힌 상호까지 알려주니 내가 아는 식당이, 내가 가졌던 물건이 손에 잡히는 듯 떠오른다.  

 

   

“그에게도 삼계탕을 사다 먹였고, 우린 넷이 둘러앉아 각자 한 마리씩 닭을 전부 발라 먹고 남은 국물에 찹쌀밥을 말아 숟가락으로 닥닥 긁어가며 싹 먹어치웠다.” (「기계장치강아지」)   

  


그냥 삼계탕을 먹었다.라고만 적어도 될 것을 시시콜콜 살을 붙여 적어 놓으니, 그 자리에 나도 앉아 있는 것 같고, 장면이 훤하게 보인다.  


    

“철물전 지나 치킨집 지나 아파트 담벼락 따라 은행 지나 개소줏집 분식점 과일가게 옻닭집 칼국숫집 지나 편의점 약국 지나 전철역 사거리에 파란불이 켜지면…” (「미꾸라지와 뱀장어와 지렁이와」)    

 


온 동네를 지도로 그릴 듯한 기세다. 그러고 펼쳐지는 이야기는 도서관에서 책 보는 이야기고 할 말이 하도나 많아서 마침표도 없다.  

 

   

“나무뿌리 사이, 낙엽더미 아래 버섯이 있는지 확인할 때 그는 짚고 온 나무 지팡이로 땅을 헤쳐본다. 버섯을 딸 때는 장갑을 끼고 버섯이 상하지 않도록 뿌리까지 파낸 후 흙과 나무 부스러기를 떨어내고 바구니에 넣는다.” (「라」)  


   

버섯 채취꾼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의 규칙이겠다. 숭고한 직업의식에서 우러나오는 자세일 텐데 시인은 무슨 수로 깊은 산속의 일을 글로 쓸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 「파」, (「목」, (「토」에도 버섯 채취꾼의 정밀한 이야기가 나온다. 버섯을 채취하는 일이나 시를 쓰는 일이나 일맥상통하는 정서의 규칙이 있다고 생각했다.  


    

제목이 「부드러운 마음」이 세 편이나 있다. 임유영 시인은 이미 2020년 『문학동네』에 ‘아침’이라는 제목으로 8편의 시와 다른 한 편이 당선되었다. 하나의 주제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를 쓸 수 있는 작가이면서 다채로운 주제의 이야기도 특이하고 생경하게 시로 썼다.



     

곰의 세계, 새의 세계, 곰팡이의 세계 등 세밀하게 관찰하고 들여다보고, 직접 그것들이 되어보는 방식의 시를 썼다. 그가 현실의 세계를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폭넓은 사유를 가진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집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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