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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휴 Oct 11. 2024

춘양장은 사돈장

자주 갈게요~ 춘양장~♡


화순 도암의 내 고향 마을은 춘양면과 경계에 있다. 재 하나를 넘으면 춘양장이 있었다. 재 너머 망실을 오가는 길은 소달구지가 다닐 정도의 폭이었다. 일요일이면 가끔, 부모님을 따라 그 밭에 갔다. 어린 나이에 무슨 일을 했겠는가. 장난이 반이었을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인적 드문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춘양장을 오가는 사람들이었다.



춘양장은 내가 어린 시절에는 3일과 8일이 장날인 오일장이었다. 70년대 말에도 춘양장은 점심을 넘기면 파장이었다. 규모가 작은 시골장을 친근한 의미로 사돈장이라고 부른다. 춘양장은 4km 거리의 능주장이나, 7.5km 거리의 이양장보다 규모가 작았다. 그래도 살림에 소용되는 것들을 대부분 구할 수 있었다. 장사와 손님, 손님과 손님들이 정이 들어서 사돈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는 뜻의 ‘사돈장’이라는 애칭이 있는 귀한 장이었다.    


  

춘양장은 춘양면 석정리에 있는 장이다. 1964년에 시장으로 등록되었지만, 주민들의 기억에 따르면 1958년 무렵이다. 6·25 전쟁이 끝난 5년 후 무렵에 개설되었는데 개장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하다가 현대적 소비유통시설이 등장하면서 이용객들이 감소하여 점차 쇠락하고 있다. - 디지털 화순문화대전에서 발췌(2013년)   


  

도암에는 중장터장도 있었는데, 중장터장은 남평장에 나오는 장사들이 오는 곳이었다. 춘양장은 화순장이나 능주장에 나오는 장사들이 오는 곳이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과 춘양장 장사들이 자주 만나다 보니, 중장터장 장사들보다 더 친숙했다. 춘양장은 광주에서도 장사들이 와서 곡식을 받아 가는 곳이라 시골에서 농사지은 곡식들의 거래가 잘 되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중장터장이 더 가까웠지만, 한사코 춘양장으로 곡식들을 내갔다.

엄마는 춘양장의 장사들과 단골을 정해 놓고 다녀서 장을 보다가 돈이 부족하면 외상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장사들은 “다음 장에 주세요”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서로 신용으로 거래할 수 있었으니, 사돈장이라는 말이 맞다.



교통이 발달하고, 슈퍼나 마트 등이 생겨나고, 인구의 감소로 인해, 춘양장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날짜가 바뀌어 2일과 7일에 자그마한 규모로라도 장이 선다는 말을 들었다. 장이라고 하기엔 부족함이 많겠지만, 다급할 때는 그나마도 고마운 춘양장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추석을 앞둔 장날에 엄마를 따라 춘양장에 갔다. 신발과 옷을 사야 해서 맞춤한 것을 사려고 장에 데려가신 거였다. 엄마는 머리에 돈으로 바꿀 참깨를 이셨다. 마을 아주머니 서너 명이 장 친구가 되어 함께 집을 나섰는데, 머리에 무거운 짐을 진 아주머니들의 떠들썩한 이야기와 웃음소리에 속없이 신이 났다.      

“○○이 엄마! 오늘은 뭐 가져왔어요?”

춘양장에 도착해 머리에 인 참깨를 내려놓는 엄마를 거들며 아주머니가 반겼다. 장터에서 되질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농사지은 곡식을 살 사람이 나타나면 되를 되어 팔아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참깨를 가져왔는데, 오늘은 뭐가 잘 나가요?”

“광주 사람들이 마침, 참깨를 찾다가 장 둘러 보고 온다고 했으니 기다려 봅시다.”

엄마의 참깨를 살 사람을 기다리는 사이, 엄마는 나를 데리고 신발을 파는 곳으로 갔다. 춘양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비릿한 장 냄새를 물리치고 고소한 튀김 냄새가 달려들었다. 튀밥을 튀는 곳에서도 맛있는 냄새가 났다.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들을 따라 시장을 걸었다.



엄마가 골라 주신 검정 고무신의 앞쪽 바깥에 꽃무늬가 도드라져 있었다. 고무 냄새와 말랑하면서도 짱짱한 고무신의 감각이 생각난다. 새 신발을 신으면, 어김없이 발뒤꿈치가 벗겨지곤 했지만, 새 신발은 어찌나 좋던지. 옷 가게에서는 빨간색 점퍼와 바지가 한 벌인 옷을 사주셨다. 추석에 예쁜 옷을 사주겠다고 하셨던 약속을 지키신 셈이다. 나는 오빠와 남동생과 비슷한 체격으로 자랐다. 엄마는 같은 치수로 세 벌의 옷을 한꺼번에 사곤 했다. 나는 치수를 재는 모델로 엄마를 따라 쫄래쫄래 춘양장을 따라가곤 했다. 옷 가게 주인은 엄마한테 세쌍둥이 엄마냐고 묻곤 했다. 그해 추석에 위아래를 빨갛게 차려입고, 추석빔을 자랑하고 싶어서 동네 골목을 많이도 들락거렸다.    



  

엄마는 곡식을 심을 때부터 그 수확물로 받을 돈의 소용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고추를, 콩을 머리에 이고, 춘양장으로 향하는 그 시절의 팍팍한 엄마를 생각하며 목이 메었다. 춘양장은 엄마가 대가족을 건사하며 살림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변통하는 고마운 장이었을 것이다. 마을 옆으로 버스가 들어와서 화순장으로, 광주로 나가기 전에는 춘양장보다 더 먼 곳에 있는 능주장까지도 걸어서 장을 보시곤 했지만, 춘양장은 엄마가 가장 자주 다니는 장이었다.



엄마가 춘양장에 곡식을 내가려면, 머리에 인 곡식 때문에 고개가 너무 아파서 쉬어가야 했다. 월평리와 산간리 입구 주막 토방, 가봉리 정자나무 아래가 쉼터였다. 주막 입구 토방에 곡식을 내렸다가 다시 머리에 이고, 출발하기에 용이했다. 특히, 가봉리 정자나무 아래는 집으로 돌아올 때도 꼭 쉬어서 오는 곳이었다. 지금도 고향 가는 길에 가봉리 정자나무 아래를 지날 때면, 삼삼오오 장꾼들과 철없이 쫄랑거리는 아이가 보이는 듯하다.



엄마는 온갖 채소들을 밭에다 손수 길렀지만, 공산품이나 생선들은 장에서 사 와야 했다. 우리 집에서 6km도 넘는 춘양장까지 걸어서 다니기엔 먼 거리인데, 곡식을 머리에 이고 춘양장에 갔다가 필요한 것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엄마는 어쩌면, 그 고단함은 다 잊고 무언가를 무겁게 머리에 이고 장으로 나갈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자식을 가진 어미의 마음이 그런 것이란 것을 이 나이가 되어보니 저절로 알게 되었다.    



  

엄마가 갓 시집온 해 어느 장날, 아빠가 춘양장을 가르쳐 주신다고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 가게 되었다. 아빠는 장을 보기도 전에 아는 사람을 만나 술집 앞에 엄마를 세워두고 술집에 들어가셨다. 아빠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무척 좋아해서 친구가 많으셨다. 장을 볼 돈도 안 주시고, 나올 생각도 않고 새로 술집으로 들어서는 사람들과 연이어 술을 드셨다. 엄마는 문지기만 하다가 배를 쫄쫄 굶었다. 파장 무렵에야 아빠의 볼일은 끝이 났다. 술값을 치르고 겨우 남아있는 돈으로 덜 싱싱한 생선과 찬거리들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장을 본 짐을 좀 들어주시려나 기대했던 아빠는 술을 많이 드셔서 팔자걸음을 걷느라 짐을 들 수 없었다. 두어 번 같은 일을 겪은 엄마는, 아빠와 함께 장에 가지 않고 혼자서 장에 가셨다. 엄마는 춘양장 이야기를 하시면서 많이 웃으셨다. 지나간 일들은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유학자이신 아빠는 손에 무얼 들고 다니시는 분이 아니셨다. 우리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사 들고 오신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할머니께 드릴 것은 종종 사 오셨다. 할머니께서 좋아하시는 꽃게를 춘양장에서 사 오시곤 했다. 엄마가 꽃게 간장 볶음을 해드리면, 할머니께서 입맛이 없으시다가도 그 반찬에 밥을 드셨다. 엄마는 들일이나 집안일 등으로 바쁘실 때, 외출하시는 아빠께 할머니 반찬거리를 부탁하시곤 하셨다.      




엄마가 춘양장이 아직도 열린다고 말씀하셔서 춘양장에 가보고 싶었다. 춘양면과 인근 주민들이 생필품이나, 농수산물 등을 판매하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약간의 설렘을 안고 춘양장을 찾았다. 막상, 춘양장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주차장으로 변했고, 건너편은 보건소와 복지회관이 생겼다. 철도 쪽으로 건물 하나가 있는데, 어물전인 춘양 상회였다. 춘양 상회 사장님의 “십여 년 전에 춘양장은 없어졌다”라는 말이 무척 아쉬웠다. 다시 찾을 수 없는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허탈했다. 춘양 상회 사장님은 그곳에서 생선들을 손질해 능주장과 화순장에 나가신다고 했다. 엄마는 춘양에 그나마 어물전이 남아있으니, 춘양장이 아직 있다고 믿고 싶은 거였다. 나도 춘양장에서 무언가를 꼭 사서 부모님께 들고 가고 싶었다. 마침, 부모님께서 잘 드시는 굴비가 있길래 한 두름을 샀다.

“아하! 키 자그마하고 예쁘장하신 분! 엄마는 여장부시고!”

부모님 이야기 몇 마디에 금방 알겠다고 하신다.

“사돈장 맞네요!”

의아해하면서도 활짝 웃으시는 춘양 상회 사장님이시다. 미리 주문하면 손질해서 언제든지 판매하신다고 하니, 어물전이 춘양장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싶은 것은 추억을 붙잡고 싶은 내 어리광인지도 모르겠다.      



춘양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만은 아니었다. 정을 나누고, 소식을 주고받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춘양장을 떠올리느라 모처럼 엄마와 통화를 오래 했다. 춘양장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의 장이었다는 것을 또 한 번 알게 되었다.   


-  디지털 화순문화대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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