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이
오늘의 시 한 편 (57).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바다비누
강지이
그때 바닷빛은 너무 밝았다
해변에서 웃으며 개와 달리는 아이들
사진을 부탁한 연인이 뒤돌았을 때
하늘 위로 저만치 날아가는 밀짚모자와
누군가가 건물 위에서 바다로
날리는 종이비행기
눈이 부시네
그런데 이건 너무 영화 같은 기억 아니야?
이왕 영화 같은 기억이라면,
좀더 이 앞의 장면들을 생각해보자
우리를 괴롭힌 인간보다
우리는 반드시 오래 살 거야
그러니 우리
일어나지 않은 일에 더 이상
얽매여 슬퍼하지
않도록 하자
아니 아니, 이 장면 앞에는
이런 모습들이 있었다
이래서는 너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바닷속에 손을 넣으면 내 손이 그냥 이대로
녹아 사라져버렸으면 해
파도가 요란하다
테이블 위 물컵이 모서리에서 자꾸만
자
꾸
만
흔들린다
이 장면 뒤에는 또 무슨 장면이 있었지?
밤바다 옆 보도를 함께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너무 밝아
무수한 벌레들이 저마다 반짝이고
여름 바람이 얇은 우리의 옷 사이사이를
통과한다
마른 손을 쓰다듬고
이마를 맞추었다
우리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벌레들이
계속 궤도를 그리며 움직이고
눈이 부시네
그런데 어떤 기억들이 슬퍼서 견딜 수 없었던
그런 장면들도 있지 않아?
별 도움 되지 않는 그런 건 잊어버렸어
아직도 마른 가지와 같은 손가락으로 너는
책상을 두드리다 말한다
점심시간이네?
밝지 않은 밖으로
우리는 손을 잡고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점심을 맛있게 먹을 것이다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그때 바닷빛은 너무 밝았다
(내가 본 바다들이 마구 떠올랐다. 눈이 부시던 바다들. 짙푸르면서도 잔잔하게 밀려들던 정동진, 고운 모래가 펼쳐지며 반짝이던 완도 명사십리, 파도는 좀 거칠지만, 풍경이 최고인 시원한 고흥 남열리 해수욕장…. 남열은 남편이 결혼 전에 데려간 바다였다. 남녘끝 고흥을 두 시간 넘게 울렁이는 시외버스를 타고, 읍에서 다시 완행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걸어서 도착했던 바다. 산골 사람이라 바다를 본 것도 몇 번 아니었던 때였다. 부슬부슬 비는 내려서 우산이 필요했고, 바람이 거셌고, 사람은 없는 겨울 바다였다. 커다랗게 달려드는 바다가 조금 무서웠고, 단단한 모래사장을 걸었고, 파도에 도망을 다니기도 했었던 그 바다가 흐린 날씨였는데도, 눈부시고 밝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로도 남열은 갈 때마다 그 바다는 빛났고,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