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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이 물구나무서서

이용훈

by 민휴

오늘의 시 한 편 (72).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곰이 물구나무서서


이용훈


숲 입구에 사내가 서성이고 있다 곰은 숲속 깊은 곳으로

이 계절 마지막 소풍 가고 싶다 하는데 의자에 엉덩이를 붙

이지도 못하고 일어설 수도 없어서 숲 입구만 읽고 있다 사

내의 배를 걷어차고 반쯤 남은 소주병을 던져버리면 입구가

열릴까? 당장이라도 떠나라고 수신호를 보내고 싶지만 그

들의 언어가 엄연히 다르기에 곰은 방에 앉아 배낭에 옷가

지를 넣는다 내일은 동물원에 등록하려고 일주일 단기과정,

영장류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맴도는 언어를

익혀보세요, 여러분은 늦지 않았습니다, 실업자 우대, 배웁

시다, 배워서 남 주나요, F-4 비자 발급(절지동물 가능), 전

화 상담 환영, 방문 전 전화는 필수 빨간 티셔츠와 꿀단지만

있으면 행복했던 곰, 이제는 줄자와 각도자도 잊지 않으려

고 촛불을 어디다 두었더라 읽던 책이 어둠 속으로 묻히고

엉켜 있는 나뭇가지와 새소리가, 바위틈에서 숨 쉬던 이끼

가, 잠을 자려고 오솔길 막다른 곳 곰이 물구나무선다고 문

이 될 수 없듯이 더 이상 숲이 궁금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바

라지 않아도 된다고 곰이 읽던 책을 거꾸로 세운다 책을 쌓

고 그 위에 쌓는다 내일은 조금 일찍 일어나야 할 것 같아 도

면을 그려야지 망치를 던져버리고 연필과 지우개를 챙길 거

야 줄자만 들고 다녀야지 곰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읽던 책이 어둠 속으로 묻히고 엉켜 있는 나뭇가지와 새소리가, 바위틈에서 숨 쉬던 이끼



(곰과 사람의 위치가 바뀐 것이 아닐까. 자세히 읽어 봐도 분명히 바뀐 위치다. 하긴, 사람 사는 게 곰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읽던 책이 어둠 속으로 묻히고 엉켜 있는 나뭇가지와 새소리가, 바위틈에서 숨 쉬던 이끼가” 이 부분을 읽으며 생각했다.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고 얽히고 설켜서 불확실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읽던 책을 거꾸로 세운다’는 표현에서는 ‘곰’을 뒤집어 ‘문’을 연다는 뜻으로 읽혔다. ‘내일은 조금 일찍 일어나야 할 것 같아’ 이 부분에서 알았다. 무언가 돌파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 삶의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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