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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나며

정호승

by 민휴

오늘의 시 한 편 (75).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집을 떠나며


정호승

빈집이 되기 위하여 집을 떠난다

집을 떠나야 내가 빈집이 되므로

빈집이 되어야 내가 인간이 되므로

집을 떠나면서 나는 울지 않는다


집과 사람도 언젠가 한번은 이별해야 한다

어제는 내가 집을 떠났으나

오늘은 집이 나를 떠난다

나는 집을 떠날 때 집을 집에 두고 떠났으나

집은 나를 떠나면서 나를 버리고 떠난다

강가에서는 물고기가 강물을 떠난다

물속에 살면서도 목이 말라 뭍으로 떠난다

때로는 강물이 물고기를 떠난다

빈집이 되기 위하여

새도 나뭇가지를 떠난다

나의 빈집에는 이제 어머니도 나도 없다

나의 빈집은 바람이고 구름이다

집을 떠나며 내 목숨의 그림자도

나를 떠난 지 이미 오래다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빈집이 되어야 내가 인간이 되므로



(매일 아침에 집을 떠나 일하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겠다. 나도 매일 농장으로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한다. 집에서 있는 동안은 농부의 본분이 아니므로 ‘인간’이 아니라고 표현한 뜻에 맞을지도 모르겠다. 직장 생활 이외의 가정에서의 생활은 아무래도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하고 편하게 생활하니까 또한, ‘인간’이 아니라고 표현한 시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도 될지 모르겠다. 집에 정붙이고 살다가도 어느 시점이 되면, 집이 나를 밀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집이 더 불편하고 잠도 잘 안 오고, 그럴 때는 집과 나의 인연이 다 했나 싶어서 이사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요새 그렇다. 집에 있는 것보다 농장에 가 있는 것이 더 맘이 편하다. 이 집이 빈집이 될 때 더 행복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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